의무적 통화가 아닌 언제쯤 내가 원하는 통화가 될까
요즘 나는 부모님과의 통화를 멀리 하고 있다. 우리 집 전화 통화에는 오래된 패턴이 있다. 누가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나 겨루듯, 서로의 힘듦을 쌓아 올리는 대화 방식 나는 그게 당연한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언니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기쁘거나 우울할 때 엄마한테 전화하기 힘들어. 엄마가 더 힘든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니까.. '여보세요? 딸?' 이렇게 반겨주는 게 아니라 깊은 한숨 쉬고 '왜?'가 먼저 나오잖아. 그러면 얼른 끊어야 하나 싶어서 불안해."
언니의 그 말이 참 새로웠다. 나는 엄마의 한숨, 엄마의 날 선 말투에 이미 익숙해져서 그게 문제인지도 몰랐다. 언니는 엄마에게
"이렇게 하면 두 번 전화할 것도 안 하게 돼. 고쳐보는 게 어때?"
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언니가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늘 참기만 했던 나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언니가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엄마에게 따로 연락이 왔다.
"네 언니가 그렇게 느꼈다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
서운하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그때도 끝내 엄마 편을 들었다.
"그러게..."
사랑받고 싶었던 20대 초반의 나는 옳은 말을 해준 언니보다 엄마의 서운함을 달래는 쪽을 선택해 버렸다.
아직도 나는 건강한 대화를 하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관계를 이어가는 것도 어색하고 서툴다. 가끔 친구가 나에게 조언해 준다.
"너 왜 네 상황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이야기해? 네가 너를 깎아내리면 다른 사람도 너를 그렇게 대하잖아. 너 자신을 너무 낮게 보지 마."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나도 엄마의 언어 습관을 갖고 있었다. '나 너무 안쓰럽지? 나는 늘 안돼'라는 말들을 흘리면서 상대가 나를 더 챙겨주길 바라는, 내 안의 오래 된 마음의 언어적 패턴들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엄마의 그런 말투와 마음이 듣기도 보기도 지쳐서 전화를 피하면서도, 정작 내가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조금씩 나를 돌아보게 됐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듣고싶은 대화 습관과 말투를 새로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오래 걸릴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나에게 조용히 다짐하듯 말해본다.
"그렇게까지 힘들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무 안쓰러운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조금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해보자." 어쩌면 이게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작은 응원일지 모른다.
내가 받은 오래된 말투와 마음의 방식이 내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지만, 나는 그것을 그대로 내 소중한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나는 "여보세요? 어떻게 지냈어? 너무 보고 싶었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라는 대화 방식을 조금씩, 서툴지만 어색하지만 연습 중이다. 그리고 조금씩 오래 걸리 겠지만 따뜻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되어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