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은 살고 싶어 한다.'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는 채소들을 다시 키울 수 있을까 싶은 호기심을 자극한 그 말에, 몇 년째 남은 채소들의 밑동을 물꽂이 중이다.
파와 당근, 양파, 배추, 적양배추, 청경채 등을 시도해 봤고, 당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채소들은 다시 뿌리를 내리고 살아났다.
그중 가장 극적인 재미를 안겨주었던 것을 꼽자면 단연 '적양배추'인데, 항산화 성분을 가득 품은 보랏빛 채소라 그런지 생명력이 엄청 난 녀석이었다.
물꽂이
마트에서 사 온 적양배추를 볶음 요리와 샐러드, 쌈채소로 야무지게 사용하고, 남은 밑동을 물에 담가두었다.
이때 물에 닿는 부분이 너무 많으면 녹아내릴 수 있기에 손가락 한마디 정도 깊이의 낮은 플라스틱 용기를 선택했고, 짓무르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주었다.
햇빛이 드는 부엌 창가에 적양배추를 올려두고 매일 물을 갈아주기를 일주일.
하얀 뿌리들이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컵으로 옮겨서 뿌리를 더 내리게 해 주고, 잎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컵 사이즈가 작기에 물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뿌리내림을 하는 동안에는 식집사의 가물가물해지는 기억력을 위해서라도 작은 컵에서 키우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이 고여있는 용량이 작으니 매일 물을 들여다보게 되어서, 물 마름이나 뿌리 썩음을 미리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흙으로
3주가량 주방에서 자라던 양배추 밑동을 화분으로 옮겨주었다.
흙에서 적응이 어려울까 싶어서 숯을 섞어 흙을 부드럽게 해 주고, 해조류 액비를 섞은 물을 듬뿍 주었다.
(천연 성분 해조류 액비는 뿌리 발근 효과가 있어서 식물을 키울 때 상비해 두면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다.)
식집사의 우려와는 다르게 보라색 채소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하루하루 잎이 커지더니 양배추 밑동 옆으로 새로운 싹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성장
매일 잎을 키워내던 양배추는 화분텃밭에서 보랏빛 존재감을 뽐내며 자라났고, 옆에서 올라온 새싹들도 경쟁하듯 몸집을 키워나갔다.
이리 잘 클 줄 알았으면 진작 시도해 볼걸.. 하는 후회도 잠시.
잎사귀들만 무성해지고 가운데 양배추 속이 차오르지 않았다.
양배추 속을 채워줄 질소와 칼슘이 모자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질소고정 역할을 해 주는 콩을 같은 화분에 심어주었어야 했는데, 콩 심는 것을 놓쳤으니 급한 대로 질소 성분이 들어있는 복합 비료를 추비해 주고, 계란껍데기를 이용해서 칼슘을 더해 주었다.
이후 몇 번의 추비를 마치고나니 조금씩 결구가 시작되는 듯했다.
몇 주가 더 지나 동글동글 앙증맞은 얼굴로 모양을 잡아가는 양배추를 보고 나서야 그간의 조바심이 잦아들었다.
지루한 기다림을 극복하는 법.
아기 손 크기였던 양배추가, 성인 여성 주먹만 한 사이즈로 자라는데 한 달 남짓 더 소요된 듯하다.
다 자라는 날만 기다리는 지루함 대신, 겉잎을 조금씩 수확해서 미리 맛보기로 했다.
어차피 결구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니 넓적하게 자라나는 겉잎을 수확해도 양배추의 성장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결구가 되지 않는다고 속상해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키워서 낱장으로 수확해 먹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듯 싶었다.
푸른빛이 성성한 겉잎을 떼어 세척해 주면, 잎을 감싸고 있던 하얀빛이 사라지고 보라색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때 수확한 잎은 결구 안쪽 부분보다 단단한 식감이므로 줄기 부분을 피해서 부드러운 부분만 채 썰어 활용할 수 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싹이 올라왔던 주변 양배추들도 속도를 내어 크는 것이 보였다.
사용하고 남은 양배추 밑동을 심었을 뿐인데, 그럴싸한 양배추가 되어주는 것도 모자라 형제들까지 키워내 주니 어찌나 기특하던지..
사 먹기만 하던 양배추를 키우며 이런 소소한 재미까지 알게 된 특별한 경험이었다.
수확
알이 차오르던 양배추의 성장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마트에서 봐왔던 양배추와 비교하면 애들 장난감 수준의 크기.
우스운 소꿉놀이라며 누군가는 웃어넘길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전문 농사꾼도 아니고 직장인인 내가 첫 시도만에 이 정도의 성과를 이룬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kg이 넘는 크기의 다른 식집사들의 양배추들은 텃밭에서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으며 키워내기에, 화분에서 자라난 내 것과는 그 결과가 다를 수밖 없음을 인정하면 그만.
더군다나 처음 시도한 '양배추 다시 키우기'였으므로 경험 많은 다른 식집사들에 비해 놓친 부분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큰 기대 없이 시도한 실험적 재배임에도 먹음직한 양배추로 자라나 준 녀석이 기특하고, 오랜 시간 키워낸 내가 자랑스러웠다.
누군가에 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널리 자랑할 무언가도 못 되지만 이 녀석을 키워내는 동안 자존감과 효능감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다.
자네 왔는가?
멀리서도 시선을 강탈하는 적양배추가 고운 얼굴을 하고 나를 반겼다.
불필요한 겉잎을 떼어내고 밑동에 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며, '잘 먹겠습니다.'라는 혼잣말로 양배추와 이별 의식을 시작했다.
다른 유튜브 동영상처럼 깔끔하게 양배추를 수확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는데, 고기도 썰어내는 성능 좋은 부엌 가위 앞에서도 양배추 밑동은 요지부동이었다.
제법 튼튼하게 자라난 줄기가 양배추를 쉽게 뺏기지 않으려는 듯 가위를 튕겨내기를 여러 번.
결국 줄기를 꺾어내어 양배추를 수확했다.
겉과 속이 다르다.
겉잎에서도 물이 닿은 부분마다 색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수확한 양배추의 단면을 잘라보니 색 차이가 확연했다.
자홍빛 양배추 속이 오밀조밀 차있고, 칼이 지나간 자리마다 진한 양배추 색으로 물들었다.
이런 고운 색으로 자라주다니.
정성 들여 키워낸 양배추 속살이 이리 예쁠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자르고 보니 내가 이 녀석을 키워냈다는 것이 더 실감 나지 않았다.
이게 가능하구나..
나도 가능하구나..
그간 건강에 좋다해서 억지로 먹던 양배추.
사 오는 양배추마다 너무 큰 크기에 버리는 부분이 많았었는데, 직접 키워서 식재료로 사용하니 버리는 부분도 없고, 달큼한 맛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양배추를 먹게 된 기분이었다랄까?
(몇 개월간 정성껏 키워낸 적양배추는 곱게 채 썰어 남편과 함께 들기름 향 가득한 막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간 키워낸 양배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두었더니 밤새 댓글이 하나 달려 있었다.
'거짓말입니다. 물꽂이해서 다시 심으면 밑동이 썩어서 다시 자라지 않고, 결구도 되지 않습니다.'
양배추를 물꽂이부터 키워낸 과정이 여러 영상으로 올려져 있었지만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의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을 중국 유튜버들의 거짓 영상으로 치부하는 그 사람의 댓글이 내 노력들을 부정하고 있었다.
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참다 생각해 보니, 해명할 것도 서럽다고 할 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믿지 않으려는 자는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을 테고, 일면식 한 번 없는 사람의 짧은 지식과 경험에 굳이 내 시간과 마음을 쓰지 않기로 했다.
속상한 마음을 다잡고 댓글 '삭제' 버튼을 눌렀다.
"이리 간단한 것을 괜히 상처받을 뻔했네."
양배추를 키워내는 동안 자기 효능감을 충분히 느꼈으니 그걸로 되었다 생각했다.
누군가 안 믿더라도 내가 알고 있으니 그거면 충분했다.
양배추의 속이 차는 동안 내 속도 단단해졌나보다.
먹으려고 키우는 채소들로부터 내 마음이 채워지고 있었나보다.
화분에서 채소를 키우며 별 생각을 다 해 보는 날들이다.
https://www.youtube.com/shorts/x0YheAnbnlQ
https://www.youtube.com/shorts/oLG6YBNyY6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