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심간기(聲在心間記)

-2022년 아르코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by 채선후


성(聲). 소리를 듣는다. 바람 소리에 계절이 흔들리고 있다. 계절의 끝을 떨어뜨리듯 분다. 겨우내 차갑고 센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라 해도 눈 오는 날보다 바람 부는 날이 많았다. 얼마 전에 꽃이 피기 시작하여 봄이 왔는가 했더니 바람에 다 떨어지고 없다. 모든 것이 후다닥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거리도 계절의 풍경을 잊어 가고 있다. 풍경을 대신하는 것은 바람 소리다. 떨어진 꽃잎을 날리고, 여름에 푸릇한 나뭇잎을 흔들고, 마른 낙엽을 날릴 때도, 눈 내리던 날, 거리에 가득 찼던 것은 바람이었다. 오늘 밤도 바람이 분다. 잠은 오지 않고 누워서 바람 소리를 듣는다. 휙휙. 나뭇잎이 바짝 뒤집어졌다 순식간 펴지고 있다. 바람이 콩 볶듯 나뭇잎을 볶아 대고 있다.


밤은 시간을 태우는 화장터다. 어둠이 회색 재가 되어 날린다. 바람 소리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다. 오늘은 태울 것이 많은가 보다. 밤이 태운 재를 휘몰아 다니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훑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위로 풍덩하게 올라간다. 부-우웅. 울림이 굵다. 한 계절 끝날 즈음에 이런 소리를 종종 들었다. 몇 해 바람 소리를 듣다 보니 이젠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아주 작지만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계절이 끝날 때 울리는 공기의 진동이 사뭇 마음에 든다. 바람 소리에서 떨어져 나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후두둑. 이 밤이 세차게 부서지고 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불어라. 불어. 더 세게 불어라. 그래서 천지간 너와 나 사이 달라붙을 것을 다 끊어 내라.


재(在). 쌓여 가고 있다. 살다 보면 무엇이든 달라붙는다. 계절이 오고 갈수록 시간이 살처럼 달라붙는다. 나잇살도 꽤나 두터워져 가고 있다. 어디 달라붙는 것이 시간뿐이겠는가. 당장 쓰다 버려지는 알맹이 없는 문장이 컴퓨터에도, 원고지에도 쌓여 가고 있다. 옷장을 열면 입을 것도 없는 옷들이 수두룩하다. 또, 냉장고 냉동실 문을 열면 먹지도 못하고 있는 먹을 것들로 꽉 차 있다. 창고 문을 열면 어떤가. 상자마다 쓰지도 않는 물건이 고이 모셔져 있다. 아이들 학교 다닐 때 기념으로 모아 둔 물건, 언제고 다시 듣겠지 싶어 모아 둔 테이프, 십 년도 더 된 핸드폰, 모두 다 당장 쓰지 않는 건 버린다고 했다가 다시 주워 담아 제자리에 놓아둔 것이 여러 차례 된다. 모두 버려지지도 못하고 쌓여만 간다. 왜 버리지도 못하고 있는가.

심(心). 마음, 마음, 마음 때문이다. 마음은 무엇인가. 내 몸속에 줄어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버려지지도 않는 것이 있다. 떨어지지도 않고 달라붙어 있는 ‘나’라는 생각이다. ‘나’는 고집일 뿐이다. 고집처럼 생각하는 ‘나’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마음이다. 이 ‘마음’이 보이는 것을 조종하고 있다. 마음은 선글라스와 같은 거다. 원래 깨끗하고 맑게 보이던 눈(目) 위에 덧씌워진 색안경인 것이다. 색안경을 걷어 내고 봐야 제대로 된 세상을 보는데 그렇지 못하다.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생각이 바람처럼 여기서 불었다 저리로 불어 간다. 금방 이 생각을 했다가 또, 저 생각이 일어난다는 거다. 모두 다 남는 거 없는 헛된 바람일 뿐이다. 헛된 바람에 자잘한 나뭇잎은 잘 뒤집힌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전이 뜨겁다. 오늘 날짜 지역신문 일면에 기사가 났다. ‘000 군수 후보 확정’ 어제까지 선정이 확실하다고 들었던 모 후보가 선정되지 않았다. 어제까지 다 된 듯 잔칫집이었는데 하룻밤 사이 초상집이 돼 버렸단다. 세상일이 바람에 이리저리 뒤집히는 나뭇잎과 같다. 허망하다. 허망한 생각으로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뒤집히며 들볶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바람이 말한다. 나무를 떠나라고. 그렇지! 어디든 달라붙어 있지 말자. 나무에서 떨어져 훨훨 허공 속을 날아다니자. 나무를 떠나면 되는 거였다. 난 정말 달라붙어 있는 나뭇잎이 되기 싫다. 모든 것을 다 떼 버리고 싶다. 시간이 살처럼 달라붙어 있는 나이도 싫고, 벅찬 생각이 눌러 있는 주름도 싫다. 다 벗어 버리고 싶다. 이 밤을 날아다니는 어둠 속 재가 되고 싶다. 태울 거 없이 남김없이 다 타 버린 재. 얼마나 가볍게 허공을 날아다니는가. 오늘 밤 어둠은 티끌 하나 없는 재가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간(間). 떠나보내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버림과 끊음이다. 둘 사이에서는 재가 된다. 그동안 버리지 못하던 짐을 싹 다 태워 가볍게 날아다니는 거다. 무엇을 버린다고 하는가.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사이에 놓인 차이를 없애는 것이다.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차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뾰족하게 튀어나왔던 질투, 성냄, 불만, 미움, 원망 이런 감정을 그때마다 잘라 없애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속에서 녹여 없애는 것이다. 어려운 말일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사물이 중 어려움 상대가 있다면 이해하고 이해했으면 인정해 주고, 인정했으면 칭찬해 주면 된다. 그러면 마음속 깊이 쌓여 가던 무거움에 불이 지펴져 서서히 타 버릴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마음은 따듯하게 데워지고 내 속은 재처럼 가볍게 날아다닐 것이다.

기(記). 성.재.심.간. 바람 사이를 떠다니던 ‘나’를 쓴 지 벌써 몇 해가 되어 간다. 달력장을 넘기면서 넘기지도 못하고 있는 원고를 원망했다. 내 자신의 한계인가 싶기도 했다. 무엇을 담아야 될지, 어떻게 써야 될지 원고지 넘어가는 소리가 바람처럼 들리기를 바라곤 했다. 성재심간은 어둠 밤 하얗게 태워 버린 한낱 재가 된 지나간 마음일 뿐이다.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면 그뿐인데 작은 마음이 한 켠에 일었다. 혹여 밤을 태우며 쓰고 있는 누군가 있다면 그에게 재가 되어 날아가리라.


*이 작품은 옛 산문체인 부(賦)를 잇고자 고심하여 쓴 작품이다.

심전 안중식의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가 주는 감흥과 해마다 듣던 바람 소리를 따라 나무에서 나를 흔들던 언어들이다. 이를 부(賦)의 창작기법으로 담아내고자 새로운 문체를 시도하며 제목 끝에 옛 산문체인 기(記)라 적었다.


-채선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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