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아르코 창작지원금 발표지원 선정작
푸른 바다와 너른 들에 둘러싸인 한가운데 장엄한 산이 있다. 진도군 군내면에 있는 산봉우리 전체가 바위인 금골산이다. 금골산은 진도대교를 건너 읍내 쪽으로 오다 보면 우뚝 솟아 있어 한눈에 띈다. 인근에서 자세히 올려다보면 바위가 파여 우묵하게 들어간 곳이 있는데 그곳에 석가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금골산에 대해 쓴 글은 딱 한 편 현존하는데 조선시대 이주가 쓴 「금골산록」이다. 「금골산록」은 이주(李冑)가 23일간 유배 와서 남긴 유일한 글이기도 하다. 이주는 연산군 4년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역적으로 몰리는 무오사화를 겪었다. 그때 유배 온 금골산은 이주에게 분명히 어긋난 곳이다.
살다 보면 뜻이 잘 풀어지는 순풍이 불기도 하고, 내 뜻과 다르게 꼬이는 역풍이 불기도 한다. 나와 어긋난 역풍은 풍랑이 되어 삶 전체를 덮친다. 그 풍랑이 이것저것 따져 볼 겨를도 없이 불어닥치면 간절도 풍화된다. 나는 이주의 글에서 이와 같음을 느꼈다. 풍화, 세상 모든 것이 바람에 부서져 간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바위를 밟고 올라서던 권력도, 권력을 품던 가슴도, 가슴과 가슴을 묶던 기세도, 기세를 휘두르던 몸뚱이도 세월이란 바람을 피하지 못한다. 결국 산다는 것이 먼지 한 줌으로 풍화되어 간다.
이주는 귀양 온 첫해 ‘낙엽이 문을 메우고 먼지와 모래가 방에 가득하여, 산바람이 부딪고 바다 안개가 스며들어 남장(嵐瘴)이 다복이 쌓여 거처할 수가 없었다’고 썼다. 하룻밤 새 풍랑에 떠밀려 온 이주를 생각해 본다. 사람이 산 흔적이 낙엽과 먼지로 풍화된 굴에서 이주를 맞이한 것은 바람이었다. 수북이 쌓인 먼지를 보며 이주 자신도 조금씩 부서지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금골산 앞에 펼쳐진 바다와 푸른 논과 밭 그리고 조막조막 붙어 있는 초가(草家)들. 젊은 문인 이주가 바라보는 금골산 아래 세상을 보며 풍화를 생각했을까.
이주는 바윗덩이가 풍화되어 떨어져 나간 굴을 보고 이렇게 썼다. “절정으로부터 동쪽으로 돌아 내려가기를
30보쯤 가면 마루턱 바위를 파서 오목하게 만들어 발을 붙이고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오목한 군데가 12군데 있는데 거기서 10여 보를 내려가면 북쪽 바위로 두어 걸음 나가면 또 마루턱 비탈을 파서 허공이 베개를 매 놓았다.”
허공이 베개를 매 놓았다니! 왜 허공에 매단 것이 베개였을까. 이주는 허공이 매달아 놓은 베개를 베고 누웠을까. 흔히 허공은 거스를 것 없고, 아무것도 없어 텅 비어 있음을 말한다. 어떤 이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허무하다고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허공은 다르다. 불교에서는 삶의 진리(다르마, dharma)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다. 있는 것 즉 존재하는 것을 유위법이라 하고,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무위법이라 한다. 허공은 없는 것, 즉 존재하지 않는 무위법에 속한다.
그러면 무엇을 없다고 하는가. 먼저 만들어지지 않고, 달라지지 않아야 하며, 다른 것과 만나 합쳐지는 결합이 없어야 된다. 다시 말하면 결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을 때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될 때 허공과 같다고 한다. 반대로 존재한다는 것, 즉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합되니까 만들어지고, 만들어지니까 변하게 되는 것이다. 허공은 없어질수록 묘한 힘이 생긴다. 아무 것도 없어서 만들어지지도 않고, 변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는 허공인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이때 허공의 힘을 받는 자(者)의 중요한 조건이 있다. 허공을 허공이라고 바라보는 주체자의 인식에 ‘내가 없어’야 한다. 세상 속에 ‘나’라는 인식이 사그라질수록 보이지 않던 세상 만물이 드러난다. 그 때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이는 것이다. 남편의 못난 구석이 안쓰러워 보이고, 속 썩이던 자식이 오히려 내가 살펴 주지 못한 거 같아 안쓰러워 보인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생각잡이 중심에서 ‘내’가 사라질수록 안쓰러운 세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가 보이지 않는 순간 세상 만물이 드러나는 공간, 그것이 허공이다. 난 이주의 허공이 궁금하였다. 이주는 허공,
어디까지 보았을까. 베개 삼아 베고 누웠을까. 이주의 심경을 느껴 보고 싶었다.
바람 없던 날 금골산을 찾았다. 길을 헤맸다. 내비게이션 안내 목소리만 듣고 가다 보니 길도 나지 않는 곳이 나왔다. 찾다 지쳤다. 무작정 산 어느 입구에서부터 금골산을 올랐다. 바다가 보이는 중턱에 앉았다. 굴이 있는 곳 반대쪽이었다. 어찌 되었든 바로 산 아래서 석가여래상을 보았다. 여래, 여래, 여래. 여(如)는 앞으로도 평등하고 언제나 있다는 의미가 있다. 래(來)는 어디에나 있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인 한마음이 오는 거라고 『금강삼매경론』에서는 말한다. 곧 한마음이란 것은 깨닫지 못했을 때나 깨달았을 때나 똑같이 그대로 있어 사라져 버리는 일이 없어 어디에나 있다고 한다. 시작을 알 수 없는 먼 옛날부터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시리고 맑은 존재는 있어 왔고, 또 그 마음 그대로 온다는 것이다. 여래는 이 뜻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지금은 세상을 향해 한숨만 쉬며 부서져 가도 언젠가는 지금의 부서짐으로 새롭게 드러나게 하는 깨달음을 얻고, 그 눈으로 자신에게 가려져 있던 번뇌를 한 꺼풀 벗게 된다. 시리도록 맑은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 순간 더없이 크고 아름다운 세상이 보인다. 또, 허공의 베개는 베개가 아니며, 허공이 매어 놓았다 해도 매이지 않게 된다. 곧 여래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주가 금골산으로 오자마자 맞이한 것은 듬뿍 쌓인 낙엽과 먼지였다. 하지만 허공에 매인 베개가 풀어지는 순간 낙엽은 낙엽이 아니며, 먼지가 먼지가 아닌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풍화된다. 간절함도 풍화된다. 그 뜻은 간절히 바라며 노력하고 애쓴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내놓은 흔적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흔적을 보는 순간 독이 되기 때문이다. 독(獨)은 하루아침에 풍랑이 되어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린다. 어차피 산다는 것이 부서져 결국 먼지가 된다 해도 후다닥 박살 나듯 부서지는 것보다 천천히 바람 속에 녹아지는 자신을 보면서, 바람도 느끼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조금씩 조금씩 부서져 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세상 만물의 푸르름이 바람을 타고 내게로 오고 있는 오월이다. 땅속 깊이 숨어 있던 땅의 기운이 코에 닿고 있다. 내년, 아니 그 다음해에도 이 푸른 바람을 가슴 깊은 곳에서 꽉 부서지도록 안아 보고 싶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