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아르코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코로나로 거리 두기가 계속되고 있다. 어디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한계치에 도달하고 있는 요즘이다. 공연도 번번이 취소되더니 한계에 이르렀는가. 비대면 공연이라는 것이 생겨 온라인이라는 선을 타고 컴퓨터 화면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때 송년특별음악회 소식을 받았다. 물론 직접 공연장에 가서 보는 참여 공연이라 여간 반갑지 않다. 국립남도국악원 진악당에 들어섰다. 잔잔한 강가에 배 한 척이 떠 있고, 뱃사공이 노를 젓고 있는 대형 스크린이 경계가 되어 무대를 가렸다. 스크린에 은은히 번진 먹색 그림을 보니 코로나로 인한 노여움이 가라앉았다. 공연이 시작되려는 듯 조명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몇 해 전 씻김굿을 보았다. 굿마당 공연을 남도석성 한옥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했었다. 방송국 촬영까지 할 정도로 제법 크게 펼쳐졌다. 굿거리 한마당이 끝나면 짧게 쉬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동네 주민들이 울금을 넣고 삶은 돼지고기와 김치를 내왔다. 멍석에 풀썩 앉아 김치와 고기를 먹으며 누구는 공연 이야기를, 누구는 동네 어느 집 상(喪)을 당했을 적 이야기를 했다. 또, 누군가는 지난 일을 소회(所懷)하며 누구 장삿날은 날까지 궂어 상여 매느라 고생했던 이야기, 누구는 부모님 장삿날이 생각난다고, 누구는 아부지 보내고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여직 생각난다고 했다. 모두 멍석에 풀썩 앉아 잔을 주고받으며 저마다 누군가를 저세상으로 보내던 날을 추억했다. 모두 이야기를 들으며 숙연했다가 다시 떠들썩하게 웃었다. 그렇게 망자(亡者)를 보내던 지난 일들과 지금 어느 사이 경계에서 공연은 이어졌다. 어스름하게 시작했던 공연은 어느덧 컴컴한 밤까지 이어졌다. 공연에 모인 사람들도 추임새를 흥겹게 내뱉으며 친해졌다. 굿판은 점점 짙고 애달파졌다. 당골의 소리는 어둠 언저리에 있을 죽은 넋을 초대하는 듯했다. 애잔하게 떨기도 하며 우악스럽게 꺾어지기도 하고, 화통하게 풀어헤쳐졌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소리의 대목이 이야기가 되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당골이 들고 있던 지전이 펄럭일 때는 어둠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환하게 흔들렸다. 마치 죽음이 다시 피어나는 듯했다. 그런 기억이 있어 어둠 속에서 죽음을 승화시키는 당골의 소리가 어떻게 펼쳐지게 될지 기대하며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씻김굿 막이 올랐다. 무대 가운데는 굿청으로 꾸며 놓았다. 병풍 앞에 과일과 떡으로 상이 차려졌고, 병풍 위로 사람 형상의 한지로 만든 넋이 제법 크게 걸려 있었다. 넋이 내려진 무대 오른편에 삼현육각이 앉았다. 주무가 지전을 들고 초가망석부터 펼치기 시작했다. 주무 뒤에는 조무 넷이 앉아서 같이 창을 했다. 초가망석으로 죽은 사람과 먼저 죽은 조상들을 불러들였다. ‘슬피 우는 저 벽궁새야 너는 어이 슬피 우느냐. 죽은 고목이 새순이 나서 가지가지 꽃이 피니 마음이 슬퍼 울음을 우느냐.’ 다음은 손님을 청하는 손굿쳐올리기, 손님굿, 제석굿, 넋올리기, 희설로 이어졌다.
넋올리기는 망자를 달래기 위해 망자 옷을 살았을 때 옷매무새처럼 펼쳐 놓고 지전이나 신칼의 꽃술로 들어 올리면서 무가를 창했다. 희설은 망자가 극락으로 가는 관문을 통과하기를 바라는 축원이다. ‘초제왕은 증광대 왕님이요 명호난 정태봉씨요 탄일은 이월초하루 증광여래 제일이요지옥은 도산지옥 다 지난 경오신미 임신계유 갑술을혜생은 다 초제왕님께 메었으니.’ 이렇게 가창을 하고 씻김으로 이어졌다. 씻김, 고풀이, 길닦음, 액막음까지 이 모든 굿거리가 바로 이어졌다. 출연진들의 제창 소리가 무대를 꽉 채웠다. 삼현육각의 연주는 힘차고 화려했다. 조명도 화려했다. 잠깐 주무자의 대목 소개가 끝나면 굿과 굿 사이 쉼 없이 이어졌다.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다. 공명이라는 것이 있다. 공기의 진동도 원래 가지고 있는 힘보다 더 센 힘이 생길 때가 있는데 바로 공명이다. 공명은 이것과 저것 사이를 비워 두어야 더 크게 진동한다. 감정을 담은 소리도 나아가는 소리와 머무르는 소리가 있다. 나아가는 소리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며, 폭발적이고 앞으로 나아간다. 머무르는 소리는 감정을 포용하며, 감정을 안으로 끌어당기며, 옆으로 퍼진다. 그 둘 사이에 경계라는 것이 있다. 즉 경계와 경계 사이는 공명을 위해 비워 두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잘못 틀었을 때 혹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방향을 틀 때 제대로 잘 틀어 가기 위함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교차점이 막다른 골목에서 차 방향을 돌릴 수 있게 회차(回車) 구역을 비워 두는 것과 같다. 특히 씻김은 경계에 선 소리다. 이승과 저승, 머무름과 나아가는 소리 사이의 경계 말이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육신을 쉼 없이 움직였는가. 또 얼마나 부질없음을 쫓았는가. 씻김의 자리는 쉼 없는 육신을 위해, 부질없음을 멈추게 하는 자리여야 한다.
경계에 있는 소리는 가라앉혀 주는 소리여야 한다. 무엇을 가라앉혀야 하는가. 우리는 본래 가지고 있던 맑은 마음을 허망한 것을 쫓으며, 네 것과 내 것 분별로 얼마나 많이 남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쉼 없는 그릇된 생각으로 먼지처럼 날아갈 덧없는 것만 쌓으며 살지 않는가. 이러한 그릇된 생각과 허망한 생각도 어느 정도 한계에 이르면 가라앉히고 그치게 할 때가 자연적으로 맞게 되는데 그것을 죽음이라면 죽음이고, 쉼이라면 쉼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또 다른 방향을 맞아들이고 멈추고 가라앉히는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경계를 맞게 된다. 나는 씻김을 경계에 있는 소리라 하고 싶다. 경계에서는 잘못, 그릇됨의 방향에서 살았던 이승의 삶을 잘 회차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잘 틀어 다가오는 다음 세계에서는 맑고 좋은 세계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소리에서 경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살면서 이것과 저것, 옳고 그르다, 좋다 나쁘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이 분별하며 사는가. 죽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고 생겼다고 그것이 아예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생김과 없어짐의 소리가 동시에 함께 공존하는 울림이라 하고 싶다. 섞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소리가 되기 위해 힘이 생겨나는 공간이라 하고 싶다. 마치 공명이 일어나는 곳이라 하고 싶다. 이런 소리는 꽉 차 있으면 안 된다. 적당히 비어 있어야 한다. 씻김처럼 삶과 죽음. 경계와 경계 사이는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없이 멈춰 버린 것이 아니다. 경계와 경계의 비어 있음은 멈칫 서서 다음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준비가 있어야 더 새로운 힘이 생기지 않겠는가.
난 씻김굿 공연에서 지금의 무거움을 털고 다음을 이어갈 수 있는 비어 있음, 멎음의 소리이길 원한다. 씻김굿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어둠과 밝음이 주는 두 경계 사이 빔, 멈춤이 공명이 되어 더 세게 잠들어 가는 세포를 깨워 주리라. 주무(主舞)의 하적 소리가 공명이 되어 울렸다.
‘하적이야. 하적이로구나. 가세 가세 베 거둬 가세. 씻김 받고 세왕을 가세. 인제 가면 언제 가요. 동방화개 춘풍시의 꽃이 피거든 오시라요.’ 공연은 끝났다. 돌아오는 길 내내 하적 소리가 귀에서 공명처럼 울렸다. 어둠은 밤의 경계를 감싸기라도 하듯 까맣기만 한 밤이었다. 오는 길에 일행과 저마다 공연에 대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늦은 밤길 가로등이 길가 경계선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고맙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