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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선후 Oct 28. 2022

수류단상(水流斷想)

-물따라 흘러가다

아침 7시. 방 안에 옅은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들어야 할 시각이다.  하지만 어째  초저녁이면 깔리는 어둑한 빛이 방안에 가득했다. 나는 조금 겁이 났다. 시계를 잘못 본 것도 같았다.

‘어! 이상하다. 분명히 아침인데... .’ 창문을 열어 보았다.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잔뜩 흐린 하늘에 제법 모양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굵었다. 첫 눈이었다. 눈송이는 내 앞으로 차분히 다가왔다. 내가 운전대에 앉자, 차 유리창에 가득 쏟아지더니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점점 날이 밝아질수록 눈은 비가 되어 유리창을 흐려 놓고 있었다.  와이퍼는 유리창이 흐려지기 무섭게 닦아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아름답다.  설령 눈앞을 흐리게 한다 해도, 또한 눈앞에서 빠르게 지워질지언정 분명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눈 앞에서 눈雪은 와이퍼 움직임에 따라 지워지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흔들거렸다.  어딘가를 정해 떠나고 싶었다. 어디를 가야 될까? 나는 그 마땅한 ‘어디’를 찾아내기도 전에 주유소로 들어갔다.  주유를 하면서 왜 가야 되고, 무엇을 찾아야 되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좀처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로? 무엇 때문에? 이런저런 질문에 이유를 대기도 전에 차에 기름은 채워졌다. 나는 ‘그냥’이라는 말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면서 시동을 켰다.      

어디! 어디! 어디로! 불현듯 군산이 떠올랐다. 지난주부터 읽고 있는 책이 채만식의 탁류였기 때문이다. 미두장! 채만식! 이 있는 군산으로 가는 거다.  나를 흐려놓고 있는 청년 채만식을 만나고 싶었다. 요 며칠 나는 그의 글에 흐려지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채만식을 흐리게 한 것이 무엇인지 따라가 보고 싶었다.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탁류(濁流)!  존재하는 것은 흘러간다.  흐름에 따라 흐려지다가, 아주 탁하게도 흐려졌어도 어느 순간 맑혀지기도 하면서 흘러간다.  흐름을 흐리는 것이 쌀이 되었건, 돈이 되었건, 흙이 되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흐름을 타고 있는 존재는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설령 흐름이 온 마음을 괴롭게 흔들어 놓는 탁한 흐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계속 흘러간다는 것이고, 정말 탁하게 흘러가고 있을 때, 그 때는 무엇 때문에 흐려지고 있는지 잠시 멈춰 고심해야 될 때라고 알아채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도 흘러가고 있다.

글쎄! 내가 타고 있는 물결이 흐려지고 있는 물인지, 맑아지고 있는 물인지 잘 모르겠다.  흘러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금까지 흘러 온 것 같다.  나는 그저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군산항까지 흘러갔다. 군산 하늘 역시 흐렸다.  군산도 곧 눈이 올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군산 앞바다가 멀리까지 보이지 않았다.  채만식 문학관 근처에 차를 멈췄다.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다.  파도가 일렁였다.  파도 소리에 초봉이 울음소리가 안쓰럽게 들려왔다. 고태수가 늙은 김씨 남편 손에 들린 방망이로 죽은 모습을 보고 한없이 울음을 쏟고 있는 초봉이 모습이 떠올랐다.  형보의 소름 돋는 웃음소리도,  초봉을 바라보는 나이 많은 박제호의 느끼한 웃음도, 청년 승재를 바라보는 초봉이의 애틋한 눈빛도 모두 파도소리가 되어 나에게 흘러왔다.  왠지 모를 묵직한 느낌도 따라 밀려 왔다.  형보를 받아주지 못하는 초봉이가, 초봉이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형보가, 미두장으로 돈을 벌겠다고 드나들었던 정주사가, 그들 모두가 타고 흘러가고 있는 물결이 안쓰러웠다.  왜냐하면 그 물결은 지금 나에게 흘러 왔다고 군산 앞바다가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초봉이가 흘린 눈물은 내가 흘린 눈물이 되었고, 형보처럼 잔뜩 그늘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나를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형보까지 이해해야만 한다고 채만식이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모든 것을 안아주면서 흘러가야만 된다고.’ 그는 그런 말들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쓸쓸히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다가갔다.  나를 따라 흘러오던 군산항 바람은 현관문을 쌩하니 흔들고 가버렸다.  건물 안은 조용했다.  사무실 직원들 외에는 관람객은 없었다. 천정 불빛은 은은한 것이 따뜻했다.  중절모를 쓰고 있는 청년 채만식은 나를 보고 조용히 웃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펜 끝에 남겨진 원고지 위에 쓰인 그의 글씨를 보았다.  외로움이 물씬 묻어나는 날카로운 글씨였다.  글씨 아래 흐르고 있는 그의 생각을 읽어 내려갔다.  전시관 한쪽 구석에는 골방에서 혼자 글을 쓰고 있는 그가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 모습에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글쎄. 그는 내가 얼마만큼 그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인지 떠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물었다. 

“당신을 여기까지 흘러오게 한 것은 무엇이요?”

"글... 쎄... 요... ."

나도 그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이 타고 있는 물결 어디쯤 보고 있을까요? 저는 당신이 탄 물결 속에서 당신과 함께 흘러가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은 안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요. 이렇게 당신을 뵙게 되어 반가워요.”

“......”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전시관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들어가기 전보다 군산 앞바다는 더욱 탁하게 흐려 있었다.  하늘도 또 다시 멀리 흘러갈 준비를 하고 있는지 더욱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얼마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지 하늘 아래 군산 앞바다는 뿌옇기만 했다.  철새들까지 멀리 날 생각도 하지 않고  모래사장 위만 기웃거리고 있었다.      

 미두장이 인생을 흐리게 하던 군산! 어느 여자가 안쓰러운 인생길로 들어선 곳!  야심 찬 누군가를 괴롭게 하던 곳! 그런 곳! 군산 앞바다는 말없이 흐려지고 있었다. 어디 인생을 흐리고 있는 것이 미두장만 있겠는가? 어디 군산에만 미두장이 있었겠는가? 미두장이 없는 지금도 누군가의 인생은 어디서든 흐려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군산 앞바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흐린 겨울바다 위로 철새 몇 마리가 낮게 날개 짓을 시작했다.        

군산 앞바다를 기웃대고 있는 철새! 또 다시 살던 곳으로 날아가야 하는 철새!  내가 찾던 탁류의 근원을 철새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철새는 흘러가는 많은 물을 보았을 것이다. 그 물은 청류(淸流)도 있었을 것이고, 탁류(濁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들은 그렇게 물 따라 흘러간다. 원하던, 원하지 흘러가는 것이 인생인지 모른다. 나는 탁류를 따라 흘러갈 철새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따라 가려하는데, 어떤 준비를 해야 될까?”

철새도 말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군산 앞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멀리 흘러갈 준비를 단단히 할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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