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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짜미 Jul 09. 2024

세탁기의 문을 열 수 없는 집

세탁기가 있는데 없을 뻔

  이번에 우리가 사게 된 집은 30년 된 구축 아파트다. 구축아파트인 덕에 평수가 요즘 신축대비 잘 빠져서 공간효율이 좋다. 하지만 반대로 구축아파트이기 때문에 그 시대상의 고질적은 문제를 고스란히 떠 앉아야 한다. 그 시대상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는 가전제품이다. 그 가전제품 중 세탁기 덕분에 골머리를 앓는 고통을 받았다.


  집을 구매한 지 약 한 달 정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차근차근 리모델링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모델링 준비란 공정을 계획하는 일이다. 공정을 계획할 때에는 마지막 마감에서부터 거꾸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야 마감이 고려된 공정을 계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가구를 넣을지, 어떤 가전을 들일지 등을 고민했다. 그 결과물을 토대로 원하는 공간에 원하는 가구나 가전을 넣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가장 우선시 되었다. 이 작업을 해두는 이유는 가구나 가전에 필요한 전기나 설비작업이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정해지지 않으면 초반에 전기/설비 작업의 방향성을 잡는 데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작업을 우리가 할 예정이지만 그렇다고 고생을 고생대로 해두고 나중에 가구가전에 따라 다시 철거하고 변경하는 그런 수고로움은 겪고 싶지 않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가전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전자제품 파는 곳을 돌아다녀봤다.


  가장 먼저 냉장고를 알아봤다. 요즘에는 화면이 나오는 냉장고도 있고, 노크하면 안이 보이는 냉장고, 물이 나오는 냉장고 등 정말 많은 종류의 냉장고가 있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신상 냉장고를 하면 좋지만 우리는 그런 여유를 부릴 형편이 되지 못한다. 또한 집이 구축아파트이고 평수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무작정 큰 냉장고를 산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상 냉장고보다는 좀 아래에 있는, 보급형 보다는 조금 위에 있는 냉장고를 택했다. 물론 화면도 없으며, 노크는 할 수 있지만 냉장고는 반응이 없을 것이며, 물이 나오게 된다면 그건 냉동실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해야 할 정도의 냉장고다. 냉장고를 둘 위치를 확인하여 문을 닫았을 때 크기는 어느 정도 되며 열었을 때는 간섭이 어느 정도 생길지를 아내와 나 둘이서 상황극을 하면서 판단했다. 상황극을 해 본 결과 같은 제품이지만 크기를 골를 수 있는 두 가지 조건 중에 더 작은 크기의 냉장고를 선택했다. 분명 작게 더 작게 해서 골랐는데 마지막 선택에서 더 작은 걸 선택해야 할 줄은 몰랐다. 우리가 살 집은 '넓은' 주방이 아닌 '긴' 주방이라 자칫 깊이가 깊은 냉장고를 고른다면 주방을 오며 가며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들어가야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저렴한 냉장고를 고른 이유는 형편의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김치냉장고가 필요하여 메인 냉장고에 추가로 김치냉장고를 사기 위함이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아내가 김치광이기 때문에. 더 넓은 범위로 말하자면 아내의 가족 모두가 김치광이다. 그것도 '아주 굉장히 엄청나게 신'김치를 눈을 조금도 찡그리지 않고 드시는 신맛주의 가족이다. 물론 나와 나의 가족들은 '신김치!'라는 말만 해도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리며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지는 신맛기피자들. 나는 김치가 없어도(없는지도 모르고) 밥을 열심히 잘 먹지만 아내의 집은 다른 반찬이 다 있어도 "김치는?"하고 이야기가 나오는 집이다. 그래서 아내의 집에 가서는 식사 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밥을 먹는다. 손바닥보다 더 큰 접시에 신김치 반 포기(?)를 턱 하니 올려두고 식사하는 게 자연스러운 집이기 때문이다. "사위는 이 김치 셔서 못 먹을 테니 다른 김치 가져다줄게"라는 배려심 넘치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모습에 나는 "아닙니다! 저 신거 잘 먹습니다!" 하면서 김치를 과감하게 집어 먹고는 맛있다는 말과 함께 모든 감각기관이 파르르 떨렸던 적도 있다. 모두들 재밌어하시며 웃었지만 나는 신맛에 머리가 띵해져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혔던 아찔한 추억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혼집에는 아내의 집에서 김장을 하여 보내주시는 김치를 받을 김치 냉장고가 필요하다. 그래서 김치냉장고를 추가로 하나 더 사기 위해서 저렴한 메인 냉장고 구입을 고려했다. 냉장고의 선택지를 좁혀 두고 다음 진열코스로 이동했다.


  다음 진열대에서는 에어컨을 봤다. 에어컨은 딱히 간섭에 문제없으니 시간적 여유를 두고 고르자고 말하며 패스. 그다음은 정수기와 식기세척기. "정수기도 아직 크게 중요한 게 없으니 패스. 식기세척기도 싱크대 하기 전까지만 고르면 되니까 패스"라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한동안 식기세척기를 쳐다보다가 지나갔다. 식기세척기는 참 계륵 같은 존재. 누구는 '있으면 삶이 달라진다'는 말을 할 정도로 최고라 그러고 누구는 '있어도 설거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데 돈을 그렇게 주고 사는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나도 후자와 같은 마음이지만 아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기도 하고 필요성을 느낀다면 구매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장단점이 있겠지만 내가 고려를 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아기가 생겼을 시기다. 주변 여러 사람들 중 현재 아기를 키우고 있는 집에서 식기세척기는 꽤나 쏠쏠하게 부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비록 오래 걸리고 애벌 설거지를 해서 넣어야 하지만 설거지하는 시간에 아기에게 조금 더 관심을 줄 수 있고 설거지가 되는 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세탁기를 돌리는 동안 청소를 하던 정리를 하던 그런 느낌. 하지만 지금은 아기가 있는 게 아니니 후에 고려를 해볼까 한다. 어쨌든 지금은 패스.

  그렇게 그렇게 지나가다 TV가 나왔다. 넓~~은 벽면에 각종 TV가 줄지어 있고 쨍한 컬러와 선명한 화면을 자랑하고 있었다. TV가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있는 게 없는 것보단 좋지 않을까) 나는 TV를 거의 시청하지 않는다. 켰다가도 어디서 멈춰야 할지 고민을 하다 결국 꺼버리고 만다. 간혹 좋아하는 영화가 나오면 멈추는 정도(애니메이션에 '스폰지밥'을 한다면 또 한 번 스탑). 내가 TV를 사고 싶지 않은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누군가가 TV를 볼 때 나도 잠깐 본다고 TV에 시선이 가면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옆에서 말을 걸어도 듣지를 못할 정도로 빠진다. 그러다 보니 내 일도 제대로 못하고 그 네모난 화면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런 이유에서 TV는 내 생활에서 발목을 잡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주변에서는 "TV로 다른 거 보지 말고 뉴스 틀어두고 보면 되잖아"라고 하는데 'TV속에는 재밌는 것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뉴스를 보고 있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걸 보면 TV는 사고 싶지 않은 존재가 아니라 사지 못하는 존재인 것 같다.

  반대로 아내는 TV를 시청하지 않아도 항상 틀어두는 스타일이다. 집 조용한 게 어색한 타입. 아직 TV를 고르지 않아도 되지만 잠깐 가격을 봤는데 요즘 70인치가 넘어가는 TV들은 칠백, 팔백, 구백만 원을 넘어서는 TV들도 있었다. 너무 큰 금액에 나는 소신발언을 하듯 진지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TV가 엄청 비싸구나... 일단 지금 TV가 어떤 건지 고르지 않아도 되니 우리 천천히 알아볼까?" 아내도 가격에 놀랐는지 그러자고 말했다. 물론 저렴한 TV를 구매해도 상관없지만 그런 고민은 나중에 하는 걸로. 그렇게 TV까지 패스! 우리에게 남은 건 우리가 올라오면서 처음 봤던 세탁기. 한 바퀴를 다 돌고 세탁기만 보면 여기서 볼 만한 대형 가전들은 다 보는 것이다.


  세탁기도 종류가 정말 다양했다. 요즘 얼마나 잘 나오는지 이런 기능 저런 기능 기능이 많기도 하다. 분명 살다 보면 한번 쓸까 말까 한 기능이고 그저 '표준'으로 사용할 텐데 그런 수많은 기능들이 필요한지 의문이 들었다. 속으로는 '기능 빼고 좀 저렴하게 만든 것도 출시해 주지.' 하며 야속함을 떠올리기도 했다. 세탁기를 보면서 결정해야 할 안건이 하나가 있다. 그건 다름 아닌 건조기. 건조기를 사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따라서 세탁기의 종류가 확연히 갈라진다. 건조기를 사용할 거라면 세탁기와 연동되거나 이질감이 들지 않는 드럼을 골라야 할 것이며,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통돌이를 사용해도 될 만큼 범위가 넓어진다. 이 이야기를 듣고 통돌이를 하고 옆에 건조기를 두면 되지 않냐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우리 집은 그리 넓지 못하기 때문에 최대한 위로 쌓아 올려야 한다. 이전부터 아내는 다른 건 몰라도 건조기는 사용하고 싶었다고 말했었고 나는 미국에 잠시 갔을 때 건조기를 사용해 봤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편리해서 나도 건조기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드럼형식의 세탁기를 골라야 한다. 그중 가족원 수가 적은 신혼이니 제일 큰 사이즈는 빼고 적당한 목록을 뽑았다. 뽑은 목록으로 직원에게 우리가 원하는 세탁기의 가격을 물어봤다. 우리가 들은 답변은 꽤나 놀라우면서도 신기한 답변이었다. 세탁기에도 색상마다 가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전도 인테리어에 비중을 많이 두고 나온다고 하지만 가격까지 다르다니. 회사에서 밀고 있는 시그니처 컬러의 세탁기는 10만 원 20만 원 정도 더 비싸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이쁜 색상을 하면 좋지만 세탁기만 바라보고 살 것도 아니니 저렴한(기본보다 더 기본?) 색상을 구입해야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대략적인 틀을 짠 후에 견적을 확인하고 집으로 이동했다.


  "냉장고는 우리가 잘 고른 거겠지? 우리가 고른 냉장고를 여기에 두고, 김치냉장고를 이렇게 두면 어떨까?" "에어컨은 여기 두면 될 것 같고 TV를 하게 되면 어디에 두면 좋을까?" "식기세척기를 하지 않아서 후회하거나 그러진 않을까?"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집구석구석을 둘러봤다. 그리고 보일러실 겸 세탁실 문을 열었다. 그대로 우리는 각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한 10초 정도 지났을까, 아내가 그 정적을 깼다. "여기에.. 우리 세탁기가 들어갈까?" "들어가긴 할 거 같은데 세탁기 문도, 세탁실 문도 열지 못하겠는걸." 나는 줄자를 꺼내 들었고 세탁기의 사이즈를 확인 후에 줄자로 대충의 형태를 잡았다. 역시나. 세탁기를 놓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둬야 하며 혹여나 백 번 양보해서 사용한다 하더라도 보일러에 이상이 생긴다면 세탁기 건조기를 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고 판단하고 나는 다른 곳에 놓을 궁리를 하며 베란다로 이동했다.

  우리 집 베란다는 폭이 1m 20cm 정도 된다. 길쭉한 베란다의 중간에 세탁기를 덩그러니 놓기에는 베란다라는 공간을 죽이는 일이었다. 탈락. 마지막으로 작은 방 베란다. 작은 방 베란다는 구축아파트라 그런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용도가 있었던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바닥에서 무릎 정도 올라오는 작은 벽 위에 창이 올려져 있는 형태의 베란다가 있었다. 말 그대로 그 베란다로 나가려면 창문을 열고 무릎높이정도가 되는 벽을 '넘어서' 들어가야 한다. 도대체 어떤 용도로 만들어 둔 것일까. 침대의 높이랑 비슷하겠다만 굳이 이렇게 만들어야 했을 필요가 있었을까. 어쨌든 작은 방 베란다에는 세탁기가 들어갈만한 공간이 있었다. 어차피 작은방에 베란다는 크게 사용할 일이 없으니 세탁기를 두면 딱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 베란다에 세탁기를 놓게 되면 앞으로 세탁기에 세탁물을 돌릴 때,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세탁물을 옮길 때, 건조기에서 건조물을 꺼낼 때 등 세탁건조와 관련된 순간이라면 항상 이 무릎정도의 벽을 '넘어' 다녀야 했다. 생각만 해도 지치는 상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말했다. "이 벽을 부숴버릴까?" 아내는 "그렇게 마음대로 부숴도 돼?"라며 걱정을 했고 나는 "우리 집인데 뭐 어때!"라며 농담반 진담반의 패기 넘치는 말투로 답했다. 일단 무턱대고 부숴버릴 순 없으니 천천히 고민을 해보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꾸준히 '다른 방법'을 생각 중인 듯 보였지만 나는 '고민을 해보자'라는 말과 동시에 저 벽을 '어떻게 부숴버릴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꾸준히 고민하고 있었다. 이내 아내는 나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작은방 베란다에 세탁기를 놓는 게 최선이겠지?"라고 물었고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기가 최선이야"라고 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무릎높이의 벽을 부숴버리고 세탁기를 작은방 베란다에 두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제 남은 건 어떻게 부숴버릴 것인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라는 육하원칙 중에서 다섯 가지는 정해졌지만 '어떻게'라는 한 가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 '어떻게'의 몫은 나에게 숙제로 남은 상태로 우리의 리모델링 공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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