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되기 전 남사친이었던 그는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체류하던 캐나다인이었기에 가끔씩 비자 연장 차 일본이나 태국 등 근처 외국으로 혼자 다녀오곤 했다. 한국에서 싱글로 독립 공간을 누리기도 만만찮고 매번 갱신해야 하는 비자 연장도 귀찮은 김에 이해득실 따져 시너지 효과를 최대한 누리고자 결혼한 것은 이제 나를 아는 사람 대부분이 알고 있는 부모님만 모르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결혼 후 19년이나 살던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영구이주차 신청한 영주권은 벌써 1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영국에서 10년 전 건너온 앞집 그녀는 캐나다 영주권을 발급받는데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 캐나다 공무원들 파업까지 한다는데 가뜩이나 느린 행정 처리가 얼마나 더 느려질 건지 기대가 될 지경이다.
비자연장차 고국방문이라니 호강이다. 급등한 환율로 환차손을 최소화하고자 6개월짜리로 묶어둔 소박한 예금도 탈탈 털어 지난 1년간 학생신분 유지하느라 통장잔고 훅 내려간 백수남편 통장으로 송금해주고 나니 이제 남은 건 지인들과 회포를 풀고, 이제 곧 여든이다라고 수시로 외치시는 노년의 아버지께서 설거지하는걸 뒤에서 응원하며 하루 다섯 끼를 먹어댈 일만 남았다.
첫날은 오자 마자 코로나기간 동안 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여러모로 많은 힘이 돼주신 옛 이웃사촌과 만나 근황을 업데이트하며 캐리어를 잃어버리고도 전 세계가 칭송하는 한국 치안 버프를 받아 다시 찾은 의지의 멍충미를 마구 뽐냈으며 그 길로 친동생을 만나 얼굴 도장 찍고 집으로 가서 꼬박 3일간 내도록 입고 있던 옷을 드디어 갈아입었다. 다시 돌아온 부모님 집 내 예전방은 창고로 바뀐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 창고 안 물건을 한쪽으로 몰아 누울 곳을 만들고, 다리를 제대로 뻗기도 어려운 비좁은 바닥에 내 학창 시절 읽던 책과 향수를 자극하는 카세트테이프 등 온갖 잡동사니 한편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Skidrow와 Guns'n'Roses가 카세트테이프로 있다니 내 중2병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듯하다.
아침부터 밤중까지 놀겠다고 눈뜨자마자 나갈 채비하는 꽃중년 딸을 붙들고 부모님은 고기 불판을 꺼내셨다. 아침부터 무슨 고기냐고 구시렁거리면서 딸 먹이겠다고 한우로 힘 준 아침 7시 불판을 대하며, 마블링이 환상이라는 특뿔 꽃등심이라고 자랑하는 아버지 면전에 이렇게 근육 사이사이 기름이 끼도록 가둬 놓고 공장식으로 사육한 고기 싫어하고 딱히 맛있는 지도 모르겠다고 싹퉁바가지 없는 소리나 해댔다.
수요일 하루만 휴무인 친구가 남친과 고용인의 어정쩡한 경계를 줄타기하는 그놈의 차를 하루 뺏어 왔다. 내가 포항물회 타령을 시작한 걸 알고 만나자 마자 바로 포항으로 향했다. 초중고 감정적 격동기, 옆에 있어준 항상 언니 같던 내 친구는 인생의 최저점을 딛고 부상하는 중이다. 여전히 육체적으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진짜 힘든 시절은 이제 다 끝났다고 항상 세뇌시킨 보람 있게 한층 더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방패같이 생긴 웍을 인생의 방패 삼아 플람베쯤이야 폼나게 해주는 견고한 팔근육을 슬쩍 드러내며 날렵한 옷맵시를 보인다. 나 보기에 근사할 뿐만 아니라 남보기에도 견줄 바 없다.
한인마트에서 파는 냉동 물회에 눈독 들였지만 한 번도 사지 않았다. 그 인내의 끝은 참으로 맛있었다. 캐나다 외식비에 진저리 치던 나는 점심 한 끼 만칠천 원 물회가 그렇게 기꺼울 수 없다. 오랜 친구와 함께 하니 칼칼하고 달콤 시원한 물회 한 입, 국수 면발 하나하나 다 오래오래 기억될 맛이다.
식후 커피는 편의점 2+1으로! 편의점 앱에 덤으로 받은 음료를 저장할 수 있는 신박한 세상이다. 한 번도 실제로 써 본 적 없음에도, 친구에게 신문물을 전파해 주겠다고 주접을 떨며 기어이 앱을 다운로드하고 남은 커피 하나를 저장하게 했다. 둘이서 별것 안 하는데 재밌다. 별것 아닌 일에도 크게 웃으니 더 좋다.
영일대 바닷가 야자수잎으로 장식된 쉼터에 앉아 여기가 세부인가 괌인가 알 수 없다고 옆에 막걸리 마시고 트림하는 아저씨를 교묘히 카메라 앵글에서 잘라내고 주변에 널려 있는 필라이트 캔맥주 캔을 발로 쓱쓱 치운 후 내 눈에도 제법 괜찮아 보이는 사진 몇 장을 뽑아냈다. 오늘 남은 인생 중 제일 젊고 예쁜 사진 백 장 넘게 찍어 줄 거니까 앞으로 두고두고 꺼내보고 추억하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며 어색해하는 친구 사진을 마구마구 찍어 대다가 눈에 들어온 포항 스카이워크로 다음 코스를 정했다. 스카이워크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으니 촉수처럼 뻗어나오는 기계 팔 스파이더맨 빌런, 닥터 옥토푸스 같이 나왔다.
포항에서 오자마자 부모님 집 앞으로 찾아온 지인의 차에 또 올랐다. 3일 정도는 다녀야 둘러볼 대구 명물 식도락 관광을 3시간 압축으로 속성 진행하며 당근마켓 거래로 시작된 특별한 인연을 공고히 하고 서로의 현재를 응원하며 테이크아웃 막창과 길거리 흑맥주로 다시 한번 한국의 밤거리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땐 알았을까 연이어 막창을 세 번이나 더 먹게 될 줄이야...
방탕하게 먹고 마시고 주사를 부려대던 대학시절, 든든한 알리바이 제공자이자 점심 메이트, 학과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던 4인방 중 둘과 한꺼번에 연락이 되어 만나는 자리에도 어김없이 막창이다. 막창과 소주 진리의 콤보는 결혼해서 고등학생을 둔 엄마가 된 동창의 오랜만 밤나들이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오늘만큼은 아이들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잠시 내려두고 더 예뻐졌느니 하나도 안 늙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서로 남발하며 들뜨고 즐거운 기분에 취했다. 언제나 깡이 넘치던 대학 동창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특수임무 국가유공자였더라는 실미도 뺨 때리는 이야기를 안주 삼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살아낸 친구의 이야기에 숙연해지기도 하며 밤은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