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슈퍼마켓에서 파는 빵 가격이 너무 착해서 갈 때마다 동공이 흔들린다. 손이 저절로 뻗어간다. 점심 도시락에 필수인 샌드위치의 주재료, 식빵은 안 살 수가 없는데, 한국 돈 오천 원 정도에 30센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식빵을 두 줄이나 살 수 있어서 기쁘다. 깨가 잔뜩 뿌려진 완전히 하얗게 보이지는 않는 표백 안 한 밀가루로 만들었다는 걸 눈으로 확인시켜 줄 정도는 되는 누리끼리한 흰 빵을 사고 나면, 디저트 빵 보면서 또 들었다 놨다 하거나 눈으로 쓱 일일이 다 훑는다.
그 와중에 속으로 생각하며 겉으로 안 뱉으려고 노력하는 제일 첫 번째 드는 생각은 도대체 얼마나 싸구려 재료를 쓰는 걸까? 그런 후에는 이렇게 맛있는데 가격이 겨우 5천 원…. 이거 한 만 원은 당연히 넘게 생겼는데 양도 진짜 많다. 지금 할인판매 중 가격이 3천 원도 안 하네 이걸 사 말아하는 내적갈등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 디저트빵을 아직 한 번도 안 산 나를 칭찬한다. 이건 마치 라면 사다 놓고 그 라면 째려본 후 오늘도 먹지 않았다고 나를 칭찬하는 용도로 쓰다가, 어느 날 진짜 단단히 결심하고 라면 물 끓이고 라면 뜯으려는데 벌써 유통기한이 두어 달 확 지난, 내게는 자린고비 굴비 같던 그 라면, 그걸 쓰레기통에 처넣고 가스 불을 끄고 뜨거운 물 싱크대 버리고 냄비 씻어서 설거지하고 손에 핸드크림 챙겨 바르면서 느꼈던 희열에 가깝다. 가게에서 싸게 파는 데 그 가격보단 훨씬 좋아 보이는 빵 안 사기는 여러모로 참 힘든 일이다.
점심 먹고 난 후 설거지를 딱 끝내고 나니 바나나 세 개가 딱 맛있어 보인다. 갈색 반점 나타나기 시작하면 당뇨병 있는 자들은 손대지 말라는 달콤한 바나나가 된다. 웬만큼 비위 좋은 사람 아니고는 먹기 힘든 완전 푹 익은 바나나와 진짜 100퍼센트 버터에 호두가 잔뜩 들어간 바나나 브레드를 한 달쯤 전에 만들었다. 아이들한테 너무 호응이 좋아서 한 번 더 만들었는데 버터값이 만만치 않은 터라 비건 레시피 시도해 본다 이러면서 카놀라유로 대체했다. 그 바나나 브레드는 맛이 확 떨어져서 애들 한참 배고플 오후 4시쯤에 오후 간식하라고 들이밀어서 겨우 다 없앴다.
버터 끊기가 참 힘들다. 여기서 버터 조금은 한국사람들의 마늘 조금이 한 주먹인 것에 버금간다. 냉장고 속 자투리 채소 정리하는 냉파요리 아이템으로 버터 한 숟갈 녹여 셀러리, 당근, 냉동 그린빈 볶아내고 파스타 한주먹 넣고 치킨스톡큐브 하나 까서 한소끔 끓여내면 꽤 그럴듯한 맛이 나는 치킨누들수프 만한 게 없다. 소박한 재료에 간단한 요리법으로 으슬으슬 추워지고 좀 아프다 싶으면 생각나는 게, 전혀 맛이 다르지만, 꼭 예전 어릴 때 엄마가 가끔 만들어 주던 경상도식 콩나물 김치죽이 생각난다. 물론 치킨누들스프라고 해서 꼭 치킨이 들어가는 건 아니다. 정확히는 치킨향 누들수프이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는다. 진짜 버터와 호두를 잔뜩 넣고 어제 구운 바나나브레드를 오늘 아침 애들과 남편 도시락에 샌드위치와 같이 넣었다.
바나나 브레드는 구워서 바로 먹는 것보다 하루쯤 지난 게 훨씬 더 맛있다. 뜸이 잘 들었다고나 할까. 슈퍼마켓에서 나 한 번만 잡숴봐, 가성비 쩔어 너 가성비 좋은 거 좋아하잖아 하고 대놓고 유혹하던 간식빵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남편이 감사하며 먹을 바나나 브레드를 직접 만드는 것도 소소한 기쁨 중 하나다. 물론 그 기쁨을 언제 누릴지 선택권이 나한테 있다는 권력도 같이 누린다. 내 생계가 바나나 브레드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에 감사한다. 노동이 되는 순간 즐거움도 사라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나는 재밌어서 그냥 몰두했는데 저절로 생계까지 해결되는 마법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길 망상하는 일은 즐겁다. 어쨌든 즐거웠으니 완전한 시간 낭비는 아니다.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돈 쓰고 시간 쓰고 어딘가 일부러 가서 봐야 했던 눈이 눈앞에 지천으로 쌓여있다.
눈앞에 보이는 눈 쌓인 풍경이 나쁘지 않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던가. 창문 너머 눈앞에 선 커다란 나무에 눈이 잔뜩 쌓여 있는 모습을 응시하노라면 제법 근사해 보이기도 한다. 커피 한잔 만들어서 바나나 브레드 한 입 베어 물 생각을 하니 허기가 진다. 같이 수다 떨 친구가 옆에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렇게 나 자신한테 독백하듯이 주저리주저리 끄적거려 보는 재미도 나름 소소하니 즐겁다. 밀가루 22파운드, 10킬로짜리 언제 다 쓰나 했는데 벌써 머핀도 세 번 바나나 브레드 세 번해서 완전 본전 뽑았다는 생각에 또 흐뭇하다. 창문 앞 눈 쌓인 나무 보고 기분이 좋았졌고, 밀가루 포대 보고 흐뭇했으니 오늘 필수 행복감은 벌써 제법 충전한 듯하다. 행복감 충전과 비례해서 노트북 배터리 잔량은 곧 충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간당간당하다. 이제 배터리를 충전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