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주로 가는 슈퍼마켓은 아니지만 지나는 길에 닭다리 한 팩 하나 사면 하나 더라는 광고문구에 홀려 들어간 슈퍼마켓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부지런히 빨갛게 익은 산딸기만 골라 채집하듯 할인 품목을 쓸어 담던 나를 두고 남편은 거의 주저앉다시피 쭈그려 앉아 뭔가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누군가의 뒤통수를 한 참 째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가 뭘 훔치는 걸 목격해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끝내려고 예의주시하는 줄 알았다.
17년 전 한국으로 배낭여행차 와서 한동안 우리 집에서 재워주었기에 알게 된 남편의 오래된 친구와 슈퍼마켓에서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다니 정말 놀랍고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과 그렇게 친한 단짝 친구는 아니었다지만 학창 시절 이리저리 스쳐 지나가며 한 동네 살아서 얼굴을 알고 있고 켜켜이 호감을 쌓아 왔다던 그와는 그의 한국 방문 이후로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는데 다시 페이스북에 나타나서 며칠 전 남편과 커피숍에서 만나 장장 다섯 시간을 차 한잔 마시면서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회포를 풀고 왔음에도 또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코로나 기간 그의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열심히 집에서 온라인으로 석사과정을 끝낸 그의 오랜 여자친구는 박사과정을 선언하며 미국으로 가게 되어 8년이란 긴 시간을 같이 살아 거의 결혼한 것과 다름없던 사이가 깨진 것과 다름없는 이별의 후유증을 여전히 심하게 앓으며전 여자 친구가 사정상 맡겨 놓고 대책없이 떠나 버린 서로 자식 삼아 키우던 커다란 개 한 마리를 개털 알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돌보면서본인의 건강도 추스르고 있다고 슈퍼마켓 진열대 앞에서 장장 한 시간을 그렇게 서서 또 이야기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식사를 겸해 집에서 마저 하는 걸로 하고 헤어졌다.
그 친구는 일본인 엄마를 둔 아시아계 캐나다인이지만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며 딱히 일본에 대한 감상적인 유대감조차 희미한데다가 심지어 본인이 일본계 캐나다인이라는 정체성도 없다. 주변의 이해를 구하면서 인식전환에 도움이 될까 본인의 narcolepsy 기면증에 대해서는 먼저 말해주는 편인데, 덕분에 인터넷상 자료도 찾아보며 관련지식을 수박 겉핥기 정도지만 습득하게 되었다. 폭소와 큰 행복감이 기면증을 촉발시키는 매개체가 되어 즐겁게 깔깔 웃으면 잠이 들어 버리기에 한 번도 심슨가족 에피소드를 끝까지 본 적이 없다고 하니 뭔가 짠하다.
예전에 비해 요즘은 약물치료가 어느 정도는 가능해서 웃으면서 하는 즐거운 대화가 졸음까지는 유발하지만 길에서 쓰러지듯 잠들어 버리는 것은 막아준다고 한다. 어느 정도 조절하며 일상생활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기면증으로 인해 늘 졸린듯한 인상으로 면접을 통과하지 못해 그렇게 고학력이고 생각이 깊으며 똑똑한 그가 취업활동을 이제 거의 포기한 상태이며 현재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모를 간병하며 소일거리 하는 중이라 하며 우리 가족이 근처로 이사 온 것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졸려서 미치겠는 얼굴이 잔인하게도 기쁨의 표현이라는 걸 이제는 알아볼 수 있다. 사람은 얼마나 쉽게 서로를 오해하는가. 몰라서 커피나 권했던 무례에 용서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