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 현장학습 보조 역할로 또 동행한다. 오늘 필요한 인력은 총 5명, 보통은 자원봉사자 3명 정도가 따라 가는데 오늘은 스쿨버스를 타지 않고 학교에서 다 같이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리버밸리 근처 1800년도 후반에서 1900년도 전반의 초기 정착민들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간다.
산책로까지 들어 서기 전 자전거도 지나가고 전동킥보드 또는 세그웨이 타는 사람에 조깅하는 사람들도 있기에 혹여 다치거나 한눈팔다가 무리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철벽방어함과 동시에 박물관 체험활동 시 어른 한 명당 배정되는 학생들 수를 줄여서 멀뚱히 보기만 하고 참여하지 못하거나 안 하는 아이들이 생기지 않게 자원봉사자의 도움과 역량이 중요하다.
이제 몇 번 봤다고 아이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말을 붙이기도 하는데 오늘 처음 보는 아이가 있다. 대학 연구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잠깐 있다가 이번에는 캐나다로 오게 되었다는 일본 아이인데 전학 온 지 며칠 안돼서 적응 중이라고 한다. 평소에 굉장히 말이 많고 에너지 넘치는 활달한 여자 아이가 머리 하나는 작은 전학생의 손을 꼭 잡고 동생 챙기듯 잘 데리고 다니는 게 인상 깊었다.
4학년쯤 되면 여자 아이한테 새로 온 전학생 남자아이 잘 챙겨 주라 하면 싫을 수도 있을 텐데 오늘 전학생의 멘토가 되라는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 하느라 손까지 잡고 다니며 열심인 아이가 대견했다. 저번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호기심 어린 질문 공세를 퍼붓지 않아 다행이다 싶은 속마음을 살짝 감추고 그 아이에게 칭찬을 건네었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선생님의 의도였건 아니든 간에 정말 신의 한 수인 조합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익힌 몇 마디 일본어를 건네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부끄러워하면서 내가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피하면서도 내가 묻는 말에 짧게나마 대답을 해준다. 본인 보다 엄마가 영어 잘한다고 대신 깨알 엄마 자랑을 하는 아이는 기후적응은 아직 힘든지 혼자 두툼한 패딩점퍼를 입고 있다. 맑게 개인 햇살 가득한 청명한 날이지만 바람이 부니 체감온도는 제법 쌀쌀해서 나도 한 겹 더 입고 올걸 후회가 된다.
오늘 체험활동의 하이라이트인 버터밀크 흔들어서 수제 버터 만들기와 그렇게 만든 수제 버터를 잔뜩 넣어 아이들과 같이 스콘을 만들고 옛날식 장작 오븐에 굽는 제일 정신없고 자칫 하다간 주변이 밀가루 난장판이 될 수도 있는 제일 고난이도의 빡센 참여 활동은 캐나다 원주민 혈통을 반쯤 가진 자원 봉사자와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나와 파트너가 된 자원 봉사자는 둘째 아이와 같은 반 아이의 엄마이자 현재 시험을 코 앞에 두고 엄청 바쁜 역사학도인 학생이고 아이 아빠와는 아이가 태어나서 얼마 안 되고 헤어져 지금은 각자 파트너를 두고 따로 살고 아이는 아빠가 전적으로 돌보며 가끔 이렇게 아이와 시간을 보낼 기회를 만든다고 한다. 사생활 관련 질문은 서로 안 하는 게 당연하다 싶었는데 안 물었고 안 궁금합니다, 안물안궁 중 이런 TMI 가 웬일인가. 얼마 전까지 포트 에드먼턴 파크에서 역사 해설사로 일하기도 한 베테랑이기도 했는데 올해 첫 시즌이라는 신참 해설사 분이 혹시 살짝 긴장하지는 않을까 했으나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보여 다행이다.
예전 큰 아이가 4학년 때 한국 공립학교 영어 공개 수업에 따라간 남편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공개 수업 보러 온 캐나다 원어민 아빠를 두고 애들 앞에서 영어로 수업하느라 속으로 괜히 얼마나 진땀을 흘리셨을까 일화를 얘기하며 같이 키득거리고 지금 이제 첫 발을 디딘 제다이 앞에 나타난 마스터 요다 같다고 추켜 세워 주니 웃음이 빵 터진다. 100년 전 방식으로 초를 직접 만들러 간 아이들을 기다리며 아이들이 오기 전 어른들끼리 수다를 떠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는 왜 점심 도시락으로 오트밀에 냉동과일을 넣은 걸 가지고 왔을까. 이렇게 쌀쌀한 야외에서 여전히 얼음 상태인 과일조각을 씹고 있으려니 이가 시리고 먹을수록 더 배고파진다. 뜨끈하고 얼큰한 라면 한 그릇 후루룩 거리며 먹는 상상을 하며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감으니 입 안에 잔뜩 차갑고 축축한 오트밀이 골판지 박스 씹는 것 같다. 근데 종이 박스 씹어 본 적이 있긴 있었던가? 왠지 딱 그 맛 일 듯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