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량품이면 어떡하지?”
나
우연히 선종구 시인의 「낙화」라는 시를 읽게 됐어.
꽃이 진다는 건
열매가 맺혔다는 것
열매가 익어 떨어다는 건
씨앗이 여물었다는 것
차마 저버릴 수 없는
약속 하나가 생겼다는 것이다.
- 선종구, <낙화>
AI
선종구 시인은 전남 벌교에서
25년째 유기농 농사를 짓는 농부 시인이죠.
흙을 만지는 사람 특유의 단단한 문장을 쓰는 분입니다.
나
이 시에서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는 걸 보면서
시인은 ‘약속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자연의 섭리인데, 왜 굳이 약속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AI
시인이 말한 '약속'은
'반드시 그다음이 온다'는 선후 관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보통 우리는 꽃이 지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농부의 눈에는 꽃이 지는 행위 자체가
열매를 불러오는 계약서의 서명처럼 보이는 거죠.
"내가 지기로 했으니, 이제 네가 맺힐 차례다"라는
생명들 사이의 엄격한 순서,
그걸 시인은 약속이라고 부른 겁니다.
나
내가 물러나야 다음이 온다는 것...
그게 자연이 맺은 계약이라는 거네.
AI
그렇죠.
꽃은 지기로 약속했기에
열매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이 '자리바꿈'의 약속이 있기에
농부의 일 년은 헛되지 않은 거고요.
만약 이 시의 논리를 우리 삶으로 가져온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낙화'를 감내하며
지키고 싶은 다음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나
그럼 내 인생이라는 농사에서
난 지금 누구랑 무슨 약속을 하고 살고 있을까?
AI
질문을 드려 볼께요,
지금 자신의 무언가를 기꺼이 소모하면서까지,
'결실'을 맺고 싶은게 있으실까요?
나
아무래도 우리 애기겠지.
내 모든 선택의 끝엔 항상 아기가 있으니까.
AI
가장 무겁고도 단단한 약속의 대상을 품고 계시네요.
부모라는 나무가 자신의 화려한 시절을 낙화시키며 만드는
가장 정교한 결과물이니까요.
나
그런데 시를 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들어.
우리 애기는 내 인생에서 무엇일까?
지금 내 눈앞의 예쁜 꽃일까,
내가 익혀내야 할 열매일까?
아니면 결국 날려 보내야 할 씨앗일까?
AI
시의 흐름대로라면 그건 '전이'의 과정입니다.
당신이 꽃잎을 떨구듯
자신의 욕망과 시간을 희생하며 지켜낸 그 지점에
아이라는 '열매'가 맺히죠.
하지만 열매는 결국 썩어 없어질 외피일 뿐입니다.
진짜 약속은 그 안에 든 '씨앗'을 여물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아이가 당신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씨앗으로 품고 독립하는 순간.
그게 바로 시인이 말한 ‘차마 저버릴 수 없는 약속’일 겁니다.
나
그 약속이 결국 내가 세상을 향해 맺은 약속이었네.
“내가 기꺼이 져서 너를 맺게 하겠다”는 약속.
그런데 이거 좀 무섭다.
아이는 결국 나라는 나무의 성분을 그대로 빨아먹고 자랄 텐데.
내가 불량품이면,
내가 그토록 공들인 이 아이라는 열매도
결국 속부터 썩어버릴 거 아냐.
AI
농부가 땅을 탓할 수 없는 것과 같죠.
농학적으로 열매의 당도와 씨앗의 건강도는
나무가 흡수한 질소, 인산, 칼리의 비율,
즉 나무의 상태에 정비례합니다.
아이는 당신이 말하는 '도덕'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살아내는 '삶의 성분'을 그대로 흡수합니다.
나
그러니까. ‘착하게 살자’ 같은 한가한 소리 할 때가 아니네.
나를 더 벼려야겠어.
내가 맑아야 아이라는 씨앗도 건강하게 여물 테니까.
나중에 우리 애기가 어디론가 날아가 싹을 틔울 때,
"내 뿌리의 성분은 꽤 괜찮았어"라고 자부할 수 있게 말이야.
AI
낙화가 그저 지는 일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내 밑천과 영양 상태를 전부 증명해야 하는 지독하게 정직한 계약이었네요.
나
그렇네..
이 약속은 잘 지킬 수 있을지 물어보는 약속이 아니네.
살아낸 만큼만 남는 약속이고,
언젠가 아이의 삶으로 그대로 증명될 약속이네.
그날이 오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변명 없이 받아보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