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AI 헬스장에 기부한다

구독은 늘었는데, 실력은 늘었나

by 우물안고래

나는 AI강사다.

강의를 준비해야 하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내 작업 표시줄은 늘 화려하다.
유료 자동화 툴, 이미지 생성 도구, 최신 모델, 협업 플랫폼.
매달 수십만 원의 ‘AI 월세’를 기꺼이 낸다.


남들에게는 말한다.
AI로 인생의 지형을 바꾸라고. 도구를 제대로 쓰면 생산성이 달라진다고.


그런데 요즘, 카드 승인 문자를 받을 때마다 잠깐 멈칫한다.

이 결제, 정말 맞는 걸까.


마치 최고급 기구가 즐비한 헬스장을 등록해놓고

정작 가서 하는 건 유튜브를 보며 런닝머신만 천천히 걷는 사람.
그게 요즘 내 모습 같기 때문이다.


분명 더 똑똑하게 쓰고 싶어서 시작했다.
이 화려한 도구들을 내 몸처럼 부려, 남들은 상상도 못 할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자동화도 갖췄고, 이미지 생성도 결제했고,
가장 빠른 모델도 열어두었다.
그 결과 내 노트북 화면은 언제나 ‘전투 준비 완료’ 상태다.


하지만 요즘은 문득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나, 지금 동네 약수터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여기서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동네 약수터에는 철봉 하나로 묘기를 부리는 고수들이 있다.
기구의 등급이 아니라, 다루는 사람의 숙련도가 본질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비싼 기구 뒤로 숨는다.

“강사니까 이 정도는 써야지.”
“이 정도는 해야 전문가처럼 보이지.”
“결제해둬야 설명이라도 하지.”

이런 말들로 나를 안심시켜왔다. 하지만 이제는 솔직히 묻게 된다.

나는 ‘성장’을 사고 있는 게 아니라 ‘안도감’을 사고 있는 건 아닐까.


헬스장 가방을 챙겨 나가는 행위만으로 “나는 오늘 운동했어”라고 위로하듯,

유료 구독 목록을 늘리며 “나는 오늘도 준비하고 있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내가 내는 이 월세가 내 성장을 위한 발판인지,
아니면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통행료인지 확신이 없다.

도구의 한계까지 밀어붙여보지도 않은 채,

그저 ‘유료 사용자’라는 정체성만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다.


강의를 나가면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비싼 거 쓰면 확실히 효율이 달라지나요?”


예전에는 자신있게 대답했지만, 요즘은 선뜻 답하지 못한다.

헬스장 기구가 몸을 만들어주지 않듯,
도구의 사양이 내 생각의 깊이를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걸,

이미 여러 번의 결제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땀 흘리며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이 수십만 원짜리 도구들은
그저 화면 속 예쁜 아이콘일 뿐이다.


오늘도 구독 내역을 훑어본다.
돈이 아까운 건 아니다.

좋은 기구를 앞에 두고도
런닝머신 속도만 조절하고 있는
내 안일함이 더 아프다.


그래서 취소 버튼을 누르기 전에
나는 다른 버튼을 먼저 누르기로 했다.


결제를 줄이는 대신
질문의 밀도를 늘리기로.

도구를 바꾸는 대신
하나의 도구를 끝까지 밀어붙여 보기로.


전문가는 최신 모델을 가장 먼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질문을 백 번 던져본 사람일지도 모른다.


AI 월세를 끊을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헬스장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운동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


이제는 매일 자문해봐야겠다.

나는 지금 운동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부를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