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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승일 Aug 19. 2024

시위대열에 선 여자친구와 진압복 입은 남자친구

지난 2022년 전까지 경찰 조직의 구성원은 크게 두 분류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직업적인 경찰공무원과 군 복무를 대체하는 의무경찰(전경 포함)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집회, 시위 의무경찰들이 주로 전담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의무경찰 제도가 폐지되어 경찰공무원들이 모든 집회, 시위 관리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무경찰 제도는 현재 사라졌습니다.


제가 경찰공무원으로 임용된 후 처음으로 근무한 곳은 명동 근처에 있는 경찰서였습니다. 과거 그 경찰서의 가장 핵심적인 업무는 집회, 시위였습니다. 지금과 다르게 2000년 후반까지만 해도 서울의 모든 집회는 명동에 있는 명동성당 앞에서 마무리 집회를 개최한 후 해산하는 게 정석이었습니다.


1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명동성당 앞 계단에는 집회, 시위대가 천막을 치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일부 참가자들은 명동성당 주차장 쪽에서 철야를 하는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걸어서 10여 분 남짓한 곳에 있던 경찰서에 근무할 당시 아침에 출근을 경찰서로 하지 않고 바로 명동성당 앞으로 출근하기도 했었습니다.


2000년부터 근무를 시작했는데 그때 제가 담당하고 있던 업무는 집회, 시위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에 대해 언론에 제공하고 잘못 알려진 내용에 대해서는 정정보도를 요청하고 바로 알리는 일이 주된 업무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시위 현장에서 돌멩이는 물론이고 화염병(지금은 아예 없어졌지만, 유리병 안에 휘발성 기름을 넣고 천으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붙여 던지던 시위용품)까지 나올 정도로 매우 위험한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흔히 말하는 의무경찰들의 ‘군기’가 워낙 심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왜 그렇게 군기가 심했나?’ 싶지만 ‘그렇지 않으면 현장에서 위험한 일도 많이 생기고 다치는 일도 많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라는 양면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당시 한여름 7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은 여름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명동성당 앞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 시위하던 단체 세 곳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 시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어찌 보면 서울에 있는 사람들보다 지방에서 올라와 시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 당시에는 무조건 시위를 서울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집회를 하던 사람들은 회사의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집회로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어 모두 일회용 비닐 우의를 입고 있었지만, 많이들 비에 젖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전날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해 근교 대학에서 숙박한 탓인지 모두 힘들어 보였습니다.


물론 그들과 마주 대하고 있던 의무경찰들 또한 한없이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들고 있었습니다. 사실 시위 현장에서 비만큼 힘든 게 없습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불쾌지수가 올라가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경찰 측에서는 방패 등 장비들이 비에 젖으면 엄청나게 무거워지기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어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집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 집회에 참석한 2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얼굴에 빗방울이 흘러내려도 눈에서 흐르는 눈물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찡그린 듯한 표정에는 짜증보다는 뭔가 모를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마주 대하고 있던 의무경찰 무리 중 한 대원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7년 사귄 연인 사이였습니다.


남자는 2년 전 의무경찰로 입대해 이제 전역을 3개월여 남겨둔 선임자였고, 여자는 창원의 한 섬유회사에 취직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각별한 연인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너무도 다른 상황에서 서로를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과격하고 극한 대립은 아니었지만, 여자는 머리에 붉은띠를 묶고 ‘고용 안정’이라고 쓴 조끼를 입고 작은 주먹을 쥔 채 구호를 외쳐야 합니다.

 

남자는 집회가 불법적인 시위로 변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위법 행위자를 체포해야 할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잔뜩 긴장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하늘은 알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하늘에 구멍이 나기라도 한 것일까? 장대비는 계속해서 더욱 거세게 내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집회는 마무리가 되었고, 여자는 그들이 숙소로 정한 대학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 현장에서 그들을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더욱이 현장에 출동한 의무경찰은 제가 근무하던 경찰서 소속 방법순찰대로 매일 접하는 대원이었기에 친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현장에서는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남자친구는 경찰서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차디찬 대학 강당 바닥에서 잠을 잘 여자친구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던 의무경찰 대원은 제게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지금 여자친구 얼굴 한 번만 보고 올 수 있도록 외출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낮에 있었던 상세한 일과 과거 연인 사이가 된 배경까지 모두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자친구를 꼭 보고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방범순찰대의 지휘관에게 허락을 받아냈고, 제 차에 몸을 맡긴 그는 계속해서 울먹였습니다.


“왜 취직은 하지 말라는 데 해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남자친구는 여자친구와 집회 현장에서 마주쳐야만 하는 현실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대학에 도착했고 그들은 힘겹게 만나 한참을 울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도착해서 화장실에 갔다 온다며 자리를 피해줬습니다. 그때 제 차에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걱정과 위로였을 겁니다.


그리고 잠시 후 대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더 있으면 안 될 거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차로 돌아와 보니 여자친구가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심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저 또한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작별하고 우리는 경찰서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 대원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회 현장에 출동해서 성실히 근무하다 3개월 후 전역을 했습니다. 전역한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남아 있던 군 생활 동안 다시 시위 현장에서 만나지 않을까 매번 출동할 때마다 조마조마했었다고 합니다.




2024. 7. 31. 현재의 명동성당 모습


그리고 그 뒤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의무경찰인 대원과는 전역하고 몇 년간 연락도 종종 하고 했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부디 같이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며 아름다운 사을 계속 이어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런 ‘희망’을 믿습니다. 그때 본 그들의 모습은 절대 헤어지지 못할 사이로 보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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