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5년차 현직 경찰관입니다. 최근 순천에서 이상동기(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로 소위 ‘묻지마 범죄’로 자칫 가볍게 생각될 수 있어 경찰에서는 ‘이상동기 범죄’로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범죄로 인한 여고생의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피해 학생은 늦은 저녁 아버지 약을 사러 외출했고 장래 희망도 경찰관이었습니다. 이번 사건처럼 이상동기 범죄는 사회적 약자나 여성들을 대상으로 주로 발생하고 있어 너무 화가 납니다.
저는 지난 7년여간 신림동을 관할하는 경찰서에서 근무했었습니다. 당시 근무할 때도 이상동기 범죄와 유사한 사건들이 꽤 있었습니다.
‘등산 후 하산해 버스정류장에서 쉬고 있던 등산객 흉기로 찔러’
그날은 평온한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관내를 순찰하고 있는데 순찰차 안에서 긴급 경고음과 함께 112신고 ‘코드 0’ 사건이 모니터에 현출되었습니다. 신고 내용은 ‘옆에서 어떤 남성이 흉기에 찔렸다’라는 신고였습니다. 이런 경우 최 인접한 순찰차는 물론이고 주변 순찰차들도 지원하게 됩니다.
당시 팀장이었던 저는 개인별 임무를 무전으로 전파하고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피해자는 심한 출혈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피해자는 119구급대의 지원으로 바로 병원으로 이송했고 현장을 이탈하지 않았던 가해자와 주변 목격자를 대상으로 진술을 청취했습니다. 관악산을 등산하고 하산해 버스정류장 옆 의자에서 쉬고 있던 피해자를 일면식이 전혀 없던 가해자가 흉기로 찌른 것이었습니다.
술에 취한 가해자를 체포하고 여러 차례 동기에 대해 질문했지만, 횡설수설만 할 뿐 끝까지 뚜렷한 범행동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가해자는 구속되었고 피해자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택시 요금도 지불한 손님, 이유없이 기사 폭행하고 도주’
또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평일 오후 신림동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운전 중이던 택시 기사를 내리게 하고 건물 내 어두운 주차장으로 데려가 폭행하고 도주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택시 기사는 심한 폭행으로 인해 6주의 상해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구대에서 구체적인 진술을 들었는데 술에 취한 승객이 갑자기 멈춰달라고 하더니 어두운 주차장으로 따라오라고 해 가게 됐고 갑자기 폭행하고 도망갔다는 황당한 진술이었습니다.
택시 기사는 80대의 고령이었습니다. 그 나이에도 택시를 할 수밖에 없던 사연도 있었습니다. 중증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차가 없으면 불가능했습니다.
범인을 반드시 잡고 싶었습니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과 업무 시간이 끝난 뒤에도 잠복근무하면서 보름 만에 범인을 검거했습니다. 당시에도 범인은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며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CCTV와 택시 내부의 블랙박스를 통해 자백받았습니다. 더욱이나 황당했던 건 승차할 때 이미 다른 일행이 요금을 낸 상황이었습니다.
택시기사 폭행 피의자를 검거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만들었던 당시 자료 일부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는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이상동기 범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시에서는 휴대용 안심벨 ‘헬프미’를 일반 시민들에게 지급하기 위해 신청받았는데 2시간에 만에 2만 개를 접수해 조기 마감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휴대용 안심벨의 ‘긴급신고’ 버튼을 누르면 자치구 CCTV 관제센터에 바로 접수되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경찰관이 주변 순찰차의 출동까지 지원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리 지정한 보호자(최대 5명)에게도 문자 메시지가 발송되는데 현재 위치와 구조 요청 내용이 함께 발송됩니다.
업무상 늦게 귀가하는 여성들이나 어두운 골목을 자주 이용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매우 좋은 제도라고 봅니다. 그럼 ‘이상동기 범죄를 예방할 수는 없을까요?’
먼저, 혼자 길을 걷다 주변에 낯선 사람이 다가오거나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가급적 밝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반드시 가로등이 설치된 곳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요즘은 길거리 건물에 붙은 간판이나 야간 네온사인 광고 등으로 얼마든지 밝은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곳도 없다면 도로변 사거리 가까이 서 있는 게 좋습니다. 그곳은 사방이 공개되어 있고 시야가 넓어 범행을 꺼리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비추는 차량의 불빛과 신호등의 불빛만으로도 충분히 밝습니다.
두 번째는, 길거리나 화장실에 설치되어 있는 비상벨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가로등에 부착된 비상벨에는 붉은 버튼과 노란색으로 주변이 칠해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직접 누르는 버튼식에서 음성인식까지 추가되고 있습니다. 당황한 상황에서 직접 버튼을 누르기가 어려울 때는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 주세요” 같은 긴급한 구조 음성을 AI가 자동으로 인식해 바로 112신고가 됩니다.
최근에는 비상벨이 반드시 눌러야 하는 버튼뿐 아니라 음성을 인식하는 비상벨이 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길을 걷다 과도한 휴대전화 사용이나 헤드셋 착용은 자제해야 합니다.
요즘은 음악이나 영상을 보면서 걷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낯선 곳을 걷거나 인적이 드문 어두운 곳을 지날 때는 잠시 꺼두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휴대전화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 상황에 대한 반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네 번째는, 밀폐된 공간인 엘리베이터 등에서 낯선 사람과 단둘이 있을 때는 가족이나 지인과 큰 소리로 통화해야 합니다.
실제로 범죄자가 범행 대상을 다른 사람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 직접 들은 바가 있습니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사람을 보고 불안해서 범행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아주 단순한 듯하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가 조심한다고 해도 모두 막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말 그대로 이상동기 범죄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대처할 시간이나 발생에 따른 어떠한 책임도 없습니다. 이번 순천에서 발생했던 여고생의 피해는 더욱이나 그렇습니다. 편의점을 가고 있는 도로 옆 인도에서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의 사전 예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 모두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서울시의 휴대용 안심벨이나 경찰과 자치단체의 협업을 통한 음성인식 비상벨은 매우 좋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상동기 범죄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가족과 이웃을 지킬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말 : 이번 글은 언론사(오마이뉴스)의 요청에 따라 작성 했으며, 조만간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