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없는 곰인형
살아가며 우리는 무의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부여된 의미 위에 감정이 생겨난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은 여러 기억들을 낳고,
그 기억들은 결국 나를 구성한다.
어릴 적, 나는 희망을 바라며 주술적인 행동들을 자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이렇다.
길을 걷다 주운 민들레 홀씨와, 다 마시고 남은 한 방울의 파란 파워에이드,
동백나무 화분에 물을 주고 넘친 물을 섞어
나만의 주문을 외우며 가장 아끼는 곰인형에게 의무를 부여했다.
너는 나의 신하이자,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만드는 수호요정이야.
앞으로 우리 가족을 지켜야 해.
그때의 나는, 마치 어린 시절의 토이스토리의 주인공처럼
나중에 커서도 이 곰인형과 절대 이별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과 다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그 곰인형에게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연속으로 했을 때는 1년 가까이,
뜸할 때에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주에 한 번씩은 꼭.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엄마는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빠가 일을 조금 쉬게 해 주세요.
엄마에게 아빠가 필요할 것 같아요.
오빠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아니면 제가 오빠의 아픔을 반만이라도 가져가게 해 주세요.
그 곰인형이 정말 우리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었는지,
아니면 내가 그 인형을 통해 위안을 얻고
그 덕분에 가족에게 더 잘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인형은 갈기갈기 찢긴 채
거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인형은 분명 누군가 엄마에게 선물했던, 엄마의 것이었지만
내가 그 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 두었기에
나에게는 훨씬 더 큰 일이었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가족의 행복을 빌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마 그때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쯤이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순진한 아이였다.
그 인형이 그렇게 찢긴 이유는,
어쩌면 엄마의 퍼포먼스였을지도 모른다.
아빠에게 보내는 일종의 시위.
이만큼 힘들다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표현.
자신을 제발 봐달라는 호소이자,
스스로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충동적인 행동.
사실 찢긴 것은 그 곰인형 하나만이 아니었다.
집에 있던 거의 모든 인형들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겨 있었고,
솜과 실밥, 천 조각들이 뒤섞여
마치 전장의 최전선에서 희생된 것들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엄마를 원망했다.
그때는 엄마가 왜 그렇게까지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 곰인형에 내가 부여해 둔
수많은 상징과 의미 때문에
그 상실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나도, 오빠도 당시
그 장면 자체가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 일은 결국, 엄마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엄마의 퍼포먼스는 그렇게 성과 없이 끝이 났고
나는 투명한 파란 봉투에 쌓인 인형들의 살갗과 내장들을 바라보며
명치 속 알 수 없는 니글거림에 시달리다 힘겹게 감정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