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옛날이야기
한번만 더 들으면 100번인 이야기
시어머님과 같이 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특히 시어머님은 오래된 옛날 일들을 주로 말씀하신다. 한 번쯤은 그냥 흘려듣는 거보다 글로 남겨두는 게 좋은 것 같았다.
어머니의 주된 이야기는 어린 시절이다. 그 시절이 그리운지 아버님과 결혼하기 전의 일들이 어머님의 머릿속에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어제 일도 기억을 못 하시는 데 과거의 일들은 어제처럼 생생하신 것 같다.
"엄마, 할머니가 또 6.25 이야기했어, 한 번만 더 들으면 100번이야"
큰딸이 소파에 앉아 있거나 집에 둘만 있는 날은 어머님은 손녀에게 옛날이야기를 늘 하신다. 나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6.25 때 8살 된 어머님이 산으로 피난 갔던 일들을….
아침 식사 후 어머님은 커피를 한 잔씩 드시는 데, 나도 커피를 타서 앞에 앉으면 둑 터진 물처럼 말씀이 쏟아지신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머님은 말씀하시는 걸 무척 좋아하는 분이다.
"어릴 때 정말 똑똑했는 데, 큰오빠가 나를 미국만 보내줬어도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몰라"
어머님은 어릴 적에 바쁘거나 몸이 불편한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서 큰 병원에서 약을 주문받아 타오는 심부름을 하셨다고 했다. 그때 의사 선생님에게는 아픈 아들이 있었는 데, 어머님이 말동무를 잘해 주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근무를 끝내고 미국으로 들어갈 때 어머님 보고 같이 가자고 하셨다. 어머님은 가고 싶어서 집에 가서 말을 했더니, 큰 오빠가 자기를 너무 이뻐해서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어머님은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고, 산후증이 심해 그 병원에 다시 갔더니 원무과 과장님이 어머님을 알아보시고는 의사 선생님이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고 지금이라도 미국에 가겠냐고 물어보셨다. 어머님은 지금은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서 갈 수 없다고 하니 많이 아쉬워하셨다고 한다. 어머님이 그때 미국에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그럼 아버님도 만나지 않고 고생도 안 하고 지금보다 더 편했을까요?' 하고 물어본다. 그럼 '좋았겠지' 하고 대답하신다.
어머님의 어릴 적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지금만 봐도 무척 똑똑하고 예쁜 아이였을 것이다. 큰오빠가 막냇동생이 예뻐서 머리를 곱게 닿아 줄 정도였으니, 어머님도 곱게 곱게 자라셨을 것이다. 단지 가난해서 어릴 적부터 돈을 벌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고생을 많이 하셨다.
결혼하고 어머님은 친정엄마와 같이 살았다고 했다. 애를 놓고 몸조리는 아버님이 다해주셨고, 살림은 친정엄마가 해주셔서 어머님은 일만 하려 다녔다고 했다. 하루는 어머님이 일하고 오셨는 데, 친정엄마 등에 업어 있던 아기가 너무 울었다고 한다.
"야가 이제 죽으려나 보다 아침부터 울음을 안 그친다." 친정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래 죽으려나봐" 친정오빠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머님은 우는 아기를 안고 이리저리 살펴보셨다고 한다. 옷을 벗겨서 몸 여기저기 아픈 곳이 있는지 살펴보는데, 발을 만지니 자지려지게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양말을 벗겨보니 고무줄이 발목에 묶여 있어 피가 안 통해서 퉁퉁 부어 있었다. 양말이 벗겨지지 말라고 고무줄로 묶어둔 걸 잊어버리고, 아기가 우는 것만 신경 쓰신 거 같았다.
"아가 울면 좀 살펴보지, 발이 이렇게 되었는 데 몰랐어요?"
그날 어머님은 친정엄마에게 굉장히 서운하고 빨리 분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머님은 남편을 어떻게 키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자식은 말썽 부리고 떼쓰고 해 달라는 게 있어서 신경을 썼는 데, 큰딸은 교통사고가 나서 이러쿵저러쿵, 큰아들은 학교 다닐 때 사고를 쳐서 이러쿵저러쿵, 작은 아들은 리틀 야구단에 넣어 달고 떼를 쓰고 이러쿵저러쿵, 막내는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그때 생각하면 '아이고' 하시는 데 남편에 대한 얘기는 없으시다. 한 번씩 물어보면 있는 듯 없는 듯 너무 조용하고 말썽을 부리지 않아 그냥 두니 알아서 컸다고 한다.
남편은 약시로 한쪽 눈이 시력이 나오지 않는다. 어머님은 이번에 백내장 수술을 하고 한쪽이 잘 안 보이니, 눈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고 하니 듣고 있던 남편이
"엄마 한 쪽눈이 잘 안 보이면 다른 눈이 곧 적응돼요. 저는 50년째 이러고 살고 있어요"
"나는 몰랐다. 니는 그래가 운전도 하고, 일도 하고 아고 안 불편했나?"
"어머님 그때 남편도 신경 좀 써주시지 그러셨어요?"
"지가 말을 안 하니까?"
지금 와서 어머님께 이렇게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식도 많고 일도 하시느라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었던 마음을, 어머님으로서는 최선을 다했을 거라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어머님은 끝도 없이 옛날 일들을 말씀하신다. 살아온 세월이 기니 하실 말씀도 많으실 것이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서 일어서면 그제야 어머님의 옛날이야기는 끝이 난다.
가끔 생각한다. 나도 어머님 나이가 되면 어떤 모습이고,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하고 있을지, 어머님의 모습이 거울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듣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슬프면서도 든든한 거 같다. 힘든 세월을 살아와 이만큼 일구어 놓아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앞으로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