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현 양에게

by 방재원

제가 수현 양보다 나이를 배 이상 먹었으니까 수현 양이라고 불러도 괜찮겠지요? <소주 한 잔>이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인 줄은 몰랐습니다. 원곡 가수 특유의 꺾기와 쥐어짜는 목소리가 거슬려서 부러 찾아 듣지는 않았는데 수현 양의 청아한 목소리가 얹어지니 전혀 다른 곡이 되더군요.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저희 막내도 수현 양처럼 눈을 질끈 감고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를 반복해서 따라 불러 이제는 환청이 들릴 지경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 병상을 오가는 택시 안에서 들은 수현 양의 목소리가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뭐라도 보답하고 싶은데 이렇게 감사 편지를 쓰는 것 외에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일면식도 없는 아저씨지만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수현 양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하려 합니다. 제가 수현 양 나이 즈음에는(라떼는) 엄마, 아빠 손을 붙잡고 나온 초등학생부터 나이 드신 어르신까지 모두 광장에 모여서 붉은 물결을 이루고 다 함께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세대를 거슬러 우리 모두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죠. 쿰쿰한 땀 내음에 개의치 않고 이리저리 밀리면서도 마냥 좋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의 살갗을 기꺼이 맞닿으며 만끽할 수 있었던 마지막 축제였다는 것을.


뜨거웠던 그 여름이 지나고 각기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는 분주한 마음을 좇아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수현 양이 태어나서 어엿한 대학생이 되기까지 지난 20여 년 간 말이죠. 열심히, 포기하지 않고 살면 그것으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그렇지 않더군요. 저를 포함한 우리 세대는 여러분들께 빈곤한 각자도생의 공터만 덩그러니 남겨 놓은 채 영 포티 흉내를 내며 애써 당신들의 처지를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수현 양 또한 머지않은 앞날에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에 나가면 월급을 받게 되겠지요. 수현 양이 받은 급여 명세서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수현 양이 월 200만 원을 번다면 꼬박꼬박 10만 원 가까운 돈이 수현 양 통장에 채 들어오기 전에 국민연금이라는 이름 뒤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까마득하게 보이겠지만 수현 양도 언젠가 할머니가 될 터이고 더 이상의 경제 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경우를 대비해 국가에 보험을 들어 두는 거지요. 미안하지만... 수현 양이 매월 성실히 납부할 국민 연금은 훗날 수현 양 차례까지 기다려 주지 않을 것입니다.


업의 특성상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전국의 제조 현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거제도 조선소부터 여수 석화 산단까지, 화성 동탄의 반도체 라인부터 지금 새만금에 짓고 있는 2차 전지 공장까지... 이십 년 전 기름때 냄새가 배이고 먼지 풀풀 날리는 현장에서 뵈었던, 회사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충만했던 지금 제 나이대 아저씨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는 어설픈 우리말을 구사하는 외국 노동자 분들로 하나, 둘 채워져 있더군요. 우리나라 수출을 지탱하는 산업 현장 어디에서도 청년 세대 여러분을 뵙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수현 양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를 이미 잠식한 초고령화와 청년 인구 급감, 역피라미드 인구 구조의 '정해진' 미래가 이미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수현 양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열 명이 훨씬 넘는 어르신들을 등에 없고 이 땅에 첫 발을 내딛는 셈입니다. 입버릇처럼 너무 쉽게 얘기하는 100세 시대는 수현 양과 그 뒤를 이을 세대들에게 가혹한 형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이라는 이 조그만 나라는 여러분이 생을 다하기 전에 이미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그럼 우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감히 말씀드리건대, 여러분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연대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강남 키즈로 자라 운동권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스스로 민망하지만 여러분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제도권으로 보내고 여러분의 생존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법과 제도를 스스로 정비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 사회의 파이를 키울 수 없다면 중장년 층 이상이 독점하고 있는 부의 시계추를 조금이라도 되돌리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 앞가림하기도 벅차다고. 세상을 뒤집어엎기에는 앞세대에 비해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일 년 전 겨울, 여러분이 광장에 모여 폭력적인 시위 대신 흥겨운 행진을 벌이며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 낸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어른들의 좌우 놀이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더 큰 전쟁을 치르기 위해 남녀로 나뉘어서 서로를 비난하는 건 잠시 뒤로 미룹시다. 청년 세대의 생존이라는 공통된 의제 앞에 전열을 정비하고 목소리를 높입시다. 이미 뿔뿔이 찢어진 세상에서 또 다른 싸움을 부추기는 제 모습이 한심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만큼은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여러분 세대, 혹은 여러분 보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저희 세대 중에 여러분의 행렬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르신 중에도 분명 여러분을 응원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에게는 선거와 투표라는 마지막 보루가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의 숫자가 부족하다면 뜻을 함께 하는 다른 세대 분들과 힘을 합쳐 청년을 위한 나라를 세워 가시길 바랍니다. 지긋지긋한 N포 세대의 수렁에서 벗어나서 내 집 마련을 위한 마중물을 채우고, 나아가 다음 세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서없이 쓴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저 같은 어른들을 믿지 마십시오. 이미 몸과 마음이 늙어 버린 저는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저의 안위를 위해 얼마든지 여러분의 대척점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씩 차근차근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어른들의 꾐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국민연금 수령 시점을 약간 늦추고 금액을 조정하는 정도의 요식 행위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을 대신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꿈꾸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인데 그런 여러분을 너무 일찍 전장에 불러들여 고개를 들 수가 없네요. 부디... 건투를 빕니다.


p.s. 매주 화요일 저녁 수현 양, 그리고 함께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수현 양의 친구들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여러분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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