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이유

by 방재원

일 년쯤 전인 것 같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400자짜리 독후감을 쓰려다 성에 차지 않아 끄적거렸던 기억이. 내 안의 것을 토해내고 싶어서 글을 써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일상의 빠질 수 없는 한 조각이 되었다. 지난봄부터 트레바리와 브런치 스토리에 올렸던 글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본다. 불과 계절이 몇 차례 바뀌었을 뿐인데 당시와는 전혀 다른 감정의 결에 놀라기도 하고 촌스러운 표현은 고치려다 그때의 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대로 둔다.


<그릿>을 읽고 그릿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그리고 고군분투하는 이름 모들 타인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이른 새벽 딸아이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 자신과 화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희끗희끗 나이 듦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했고 이제는 세상을 떠난 나의 아저씨를 추모하기도 했다.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면서 나는 코로나 직전 물의 도시로, 카파도키아 성지 순례의 길로, 그리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음 골짜기 사이를 다녀왔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지리멸렬한 시간의 물결에 휩쓸려 가 버렸을 귀하디 귀한 순간들을 하나하나 볕이 좋은 글밭으로 건져 냈다.


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니터 앞에 앉을 때면 작은 설렘이 마음 한 켠 샘솟는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 준다는 벅차오름, 그럼에도 눈치 보지 않고 적어 내려가겠다는 무모한(?) 다짐, 각자도생의 망망대해에 감히 소통의 물길을 내고픈 과한 바램까지... 수많은 감정들이 거미줄을 친다. 비록 거울 앞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지나온 세월 동안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 있을지언정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은 좀 더 그럴듯한 내가 되는 기분이고 이미 관통해 온 풍경들을 비켜서서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속 오르 내림을 다스리는 데 서툰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폭군이 되기도 하고,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에는 끝 모를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렇듯 핸드폰을 끄고 숲길을 걷는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멍 때리고 숲 속을 헤매다 보면 무언가 쓰고 싶다는 욕구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글감이 떠오르면 걸음을 재촉해 노트북 앞에 앉는다. 한 자 한 자 어루만지면서 오늘도 불안과 권태 사이의 어느 한 지점에서 조금씩 균형을 잡아간다. 흐릿하지만 고통스러웠던 어둔 기억들이 무채색으로 때로는 한 가닥 빛줄기로 다가온다. 물론 먹물로 얼룩진 자욱들도 언뜻언뜻 보이지만... 이제는 연민을 품지 않고 관조하려 한다.


두 달쯤 전 개인적인 사정으로 각성 기간이 길어져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끝 무렵 상담사님께서 물으셨다. "재원님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제 머릿속 신경 회로를 바꿔 가는 중이거든요." 비록 항불안제와 인지행동치료로 시작한 지난한 시간들이었지만, 읽고 쓰고 걸으면서 어둠의 협곡을 넘어왔다. 이제는 좀 더 여유롭게 주변을 살피며 일상을 마주한다. 그리고 다가올 날들에 덜 부끄럽도록 몸과 마음을 살핀다. 내가 글을 쓰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한 셈이다.


종종 앞으로 남은 날들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마지막 날에 지금처럼 목동역 오거리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생을 마감하는 그 날을 상상하곤 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평소와 다름없는 날들 중에 삶을 매듭짓는다면 이 땅에서 떠나는 데 큰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른 그림을 그려 보려 한다. 녹음기를 앞에 두고 마지막 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들을 읊조린다. 내가 속삭이는 말들이 글자의 형상을 갖추어 주변에 하나하나 떠 다닌다. 더 이상 쓸 말이 없으면, 그때 SAVE 버튼을 누른다. 허공을 떠 도는 단어들이 가지런히 모니터 화면 위에 자리 잡는 것을 지켜보면서 천천히,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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