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이틀이면 훌훌 털고 일어설 줄 알았다. 감기 증상 중에 어지럼증이 있다고 하여 잠깐 주저앉은 거라고 생각했다. 독감 음성 판정을 받았음에도 아이가 나흘이 지나도록 걷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삿일이 아니구나 깨달았다. 보라매 병원에서 길랑 바레(말초신경계통 손상으로 인한 근 무력증)가 의심된다는 소견을 듣고 서울대 어린이 병원으로 전원 했다.
뇌와 척추 MRI, 척수액 추출, 골반 초음파, 근전도 검사... 무수히 많은 검사가 차례로 시행되었고 약물 투여로 아이는 밤마다 헛구역질에 지쳐 잠에 들었다. 검사 수치가 모두 정상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근육과 신경에는 이상이 전혀 없는데 혼자 힘으로 서지 못하고 화장실 갈 때면 흐느적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한 시도 몸에서 떼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넘게 신경과 병동 생활을 지내고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조치가 없으니 퇴원을 권유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 아이가 살아가야 할 앞날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 그럼에도 늘 밝은 얼굴로 나와 아내를 마주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속절없이 눈물만 쏟아 냈다. 아이가 아프면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불과 며칠 전까지 마음속을 서석거렸던 일은 사소한 해프닝이 되어 버렸고 오랜 시간 외면했던 하나님께 다시 매달렸다. '부디 우리 린이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대신 저를 데려가소서.' 그렇게 아득한 시간이 흘러갔다.
아내와 병실 간호를 교대하기 위해 목동에서 혜화역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는 그 길이 그나마 내가 숨 쉴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멍 때리며 지하철에 앉아있다 충정로를 충무로로 착각하고 내렸다. 다음번 전철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한번 더 숨을 고를 여유가 있어 다행이다.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 내 일상을 앞에 두고 문득 아이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다시 걸을 때까지, 아니 그것과 관계없이 내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을 마주했다. 더 이상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실성한 사람 마냥 돌아만 다닐 수는 없었다. 분명히 아이가 두 발로 일어서서 걸을 것이라는 희망과 조급함을 버리고자 하는 안간힘 사이에서 나와 아내는 다시 일상을 살아 내야만 했다.
퇴원 전날 저녁. 로비에 앉아 페파 피그를 보던 아이가 나에게 말한다.
"아빠, 나 집에 가고 싶어."
"응 내일쯤 퇴원할 수도 있어."
"정말?!!"
"근데... 걸으면 더 빨리 집에 갈 수 있대."
"그럼 한 번 해 볼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밀어내고 아이가 일어선다. 마치 평균대 위를 걷듯 두 팔을 활짝 펼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불과 두 시간 전에 의사 선생님 손을 잡지 않고는 한 발짝도 떼지 못했었는데...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번에는 내가 주저앉아버렸다.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이를 꼬옥 안았다.
"아빠 나 이제 퇴원할 수 있지?"
한번 더 걸어 보겠다는 아이를 말리고 곧장 의사 선생님께 데리고 갔다. 조금 전보다 안정적으로, 일정한 보폭으로 걷는다.
"집에 가도 되겠네요."
의기양양한 아이를 바라보며 또다시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
그리고...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전처럼 하루 종일 휠체어 신세를 지는 건 아니지만 아이는 하루에도 여러 번 주저앉았다. 몇 시간 동안이나 헛구역질과 트림을 심하게 반복해서 소아 정신과에 데려갔더니 전형적인 틱 증상이라고 한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걸 직감했다. 짜증 한 번 안 내던 아이가 밤마다 인형을 집어던지고 벽을 부서져라 발로 찬다.
"엄마, 자꾸 마음속에서 화가 나. 그리고 이렇게 짜증 내는 내가 싫어서 더 화가 나."
아이의 한 마디에 우리는 또 한 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언니, 오빠가 혼나는 것만 보고 자라온 아이, 냉랭한 집안 분위기를 귀신 같이 눈치채고 조용히 방에서 수학 문제를 풀던 아이, 떼를 쓰거나 무언가 해달라고 조르지 않는 아이... 그 아이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 억눌려 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분출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화가 나면 화를 내도 괜찮다고 얘기했지만 기어코 스스로를 제어하다 잘 시간만 되면 폭발하곤 했다.
아이 상태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일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아이가 주저앉아 있다고 불쌍히 여기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 우리 린이가 정말 불행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받아들일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결국 슬픔을 깔고 앉아 각자의 삶을 살아 내야 했다. 그리고 더디 오기를 바랬던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아침부터 눈이 세차게 내렸다. 딸아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바닥을 기어 다녔고 전날 밤 현타가 온 아내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린아 무슨 옷 입고 갈까?"
아이는 주저 없이 샤랄라 분홍빛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입학식은 열한 시부 터지만 우리 마음은 분주했다. 삼십 분 일찍 가서 처음 뵙는 담임선생님께 이런저런 사정을 말씀드리기로 했다. 오전 열 시. 혹시나 하는 바램에 딸아이에게 걸어 보겠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기우뚱하더니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는 날, 몇 시간이나 버틸지 모르지만 다행이었다.
소복이 쌓인 봄눈 길을 아내와 아이가 걷는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휠체어를 끌면서 그 뒤를 좇는다. 장화를 신은 아이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깡총깡총 뛰어다닌다. 넘어질까 하는 마음에 잔소리가 나오려다 목 뒤로 주워 삼킨다. 그저 아이의 발자욱을 따라 걷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