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이야기(4) : and then...
3주의 시간이 흘렀다. 15년간 줄이고 또 줄여왔던 항불안제를 세월을 거슬러 다량으로 복용하고 끊었던 혼술을 마시면서 우울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내가 해고 통보를 받은 것도 아닌데... 쓴웃음이 났고 조각조각난 마음을 하나하나 붙들고 침잠했다. 같은 시간 그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아니, 헤아리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일주일 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회사의 임원으로 승진한 친구를 만났다. 해고하기로 결단했다면 직원에게 기회를 주지 말고 회사에서 가이드라인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고, 그것도 데드라인을 정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요컨대 그분의 입장을 먼저 살피려 했던 내 접근이 나이브(naive)했고, 인간 방재원과 회사를 대표하는 나의 인격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분을 해고하려고 했을까?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되짚어 보았고, 무언가 변질되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조직개편으로 그분의 역할이 없어져서, 사람한테 쓸 표현은 아니지만 가성비가 떨어져서 해고를 결심했었다. 그런데... 막상 권고사직을 잠정 철회한 지금은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는 강박만 남았다. 이 분이 이대로 회사에 주저앉으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다음에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내보내야 한다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두 번째 권고사직 제안을 받은 그분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회사에서는 비밀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처음보다 나은 대우를 약속했고 친구가 조언한 대로 기한을 정해서 권고사직 수용 여부에 대해 답변을 달라는 요청을 드렸다. 급여를 깎아서라도 더 다니고 싶다는 그분의 호소가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퀭한 그의 눈빛을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어서 질끈 두 눈을 감고 자리를 떴다.
이후 두어 차례의 조정 끝에 그 분과 권고사직을 전제로 한 근로계약서를 맺었다. 당분간 다소 불편한 동행은 피할 수 없지만(새 계약 조건 중 하나가 최장 1년 연장근무이다) 서로 다른 의미의 감사를 표하는 자리로 마무리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난했던 지난 두 달 여간의 줄다리기에 일단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홀가분할 줄 알았다. 그간 각성 상태였기 때문일까... 연신 졸음만 쏟아진다. 이제 연말이라 올 한 해 직원들 평가 및 내년 급여 책정을 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결국 신뢰와 배려의 문제였다. 그분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나의 소홀함과 한 푼이라도 더 받아 내야 하는 그분의 다급함이 불협화음을 일으켜 다른 직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득 그 분 장인어른 장례식장에 갔던 기억이 난다. 저녁에 일이 있어서 급하게 찾았는데 첫 조문객이 되었다. 초등학생 정도의 그 분의 두 딸에게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만원씩 쥐어쥐고 그 분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 병원을 나섰다. 6개월 전, 아니 일년 전인가... 첫째 딸이 뇌전증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근무 중에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곤 했던 그 분과 하루종일 노심초사하며 지쳐 있을 그 분의 아내 분이 겹쳐 보인다. 하루하루 외줄타기를 하는 그 분들의 일상에 나는 칼춤을 춘 셈이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후 앞날을 그려 본다.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니 예상치 못한 변수만 없다면(사실 이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대략 향후 십 년간은 지금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모두 한 배를 탈 수 있으리라 소망을 담아본다. 그 이후는... 나도 모르겠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에 나는 또 다른 그 분과 좀 더 원만하게 헤어질 수 있을까? 원만하게 마무리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사람을 코너에 몰아넣고 최대한 잡음 없이 결단을 독촉하는 것일까? 지난 두 달 여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왔음에도 여전히 쏟아지는 질문들 사이에서 뒤척일 따름이다.
그날 이후로 검은색 마스크 뒤에 숨어 지내셨던 그분. 분명 남들에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리라. 그 조그만 천 자락 하나가 그분의 자존감을 지켜주었던 방패막이였으리라. 이 겨울이 지나고 그분이 마스크를 벗는 날이 오면 그때는 조심스레 청하고 싶다. 소주 한잔... 같이 하지 않겠냐고.
* 이 글은 팩트에 기반해 쓴 글이지만 온전히 제 관점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반쪽짜리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서사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