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이지 못해도 괜찮았는데

by 방재원

매년 9월 둘째 주 월요일이면 삼척 초곡항으로 간다. 적막한 해변 한 편에 차를 세우고 수면 아래로 한 걸음씩 내딛는다. 풍덩 뿌연 모래 안개가 걷히고 물빛 물고기 떼를 좇다 보면 집채만 한 바위 틈틈이 흐물거리는 검푸른 해조류를 마주한다. 물결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며 질서 있는 춤의 향연이 펼쳐진다. 눈동자가 바닷말의 춤사위를 따라잡지 못하고 이내 피곤함에 눈을 감는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은 순간. 자의로 타의로 짊어진 짐들을 슬며시 풀어놓으며 유유히 떠다니다 보면 카라멜 팝콘을 닮은 모래자갈 촉감에 반쯤 눈이 떠진다.


간이의자를 펴고 미지근한 캔맥주를 목구멍 뒤로 넘기면서 미처 살피지 못했던 풍경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우뚝 솟은 촛대바위 너머로 번져가는 오렌지빛 노을과 구멍이 숭숭 뚫린 돌무덤 위를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갯강구까지. 스멀스멀 음의 감정이 올라올까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는데 왼쪽 발목에 척 달라붙은 황갈색 미역 자락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넌 왜 혼자 여기서 이러고 있니? 다른 애들이랑 같이 춤추지 않고.


대학에 가면 꼭 한번 무대 위에 서 보고 싶었다. 까마득한 무대 위에서 한 가닥 조명에 비춰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왠지 근사해 보였다. 그렇게 새내기 시절 연극반 동아리를 찾았고 3개월 여의 우여곡절 끝에 첫 공연을 간신히 마쳤다. 연극이 끝난 후를 함께 부르며 수많은 말들이 술잔에 얹혀서 어지러이 돌아가는 동안 분장실 거울 앞에 앉아 눈썹 위에 덧칠한 검은색 선만 연신 닦아댔다. 모든 것을 소진하고 파도에 쓸려 뭍으로 드러난 한 줌의 미역처럼.


이후에도 늘 그런 식이었다. 호기심에 시작한 살사 댄스는 파트너 눈을 마주치는 게 부담스러워 한 달 만에 줄행랑쳤다. 공으로 하는 운동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입한 첫날 나선형으로 멀어지는 셔틀콕을 걷어 내려 뻗은 다리가 아킬레스건 파열로 종지부를 찍었다. 거의 유일한 취미인 독서를 지렛대 삼아 발을 담근 트레바리조차 달뜬 마음과 의기소침 사이를 분주히 오가다 조용히 나가기 버튼 뒤로 사라졌다. 진득하게 한 자리에 머물며 타인과 유대감을 유지하는 건 딱 하루치 정도의 나라는 인간에겐 요원해 보였다.


혼자여도, 무리에 굳이 섞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니 도리어 혼밥과 걷기, 그리고 책을 읽는 반복되는 일상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뒤틀리고 꼬인 전반전을 마치고 파문 하나 일지 않는 호수 같은 남은 날들을 내심 기대했는데... 어쩌면 안에 여전히 일렁이는 바다가 웅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가면 쉼 없는 뜀박질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일으킨 성실한 청년과 늦은 밤 공연 연습을 마치고 막잔을 함께 나누러 대학로에서 달려온 듬직한 소믈리에를 만날 수 있다. 3그램의 소금을 얹은 200그램의 삶은 양배추로 자기 관리의 끝판을 보여준 당찬 그녀와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캡모자 속에 얼굴을 감추고 내가 이만큼 성장했노라 오직 글로써 웅변하는 도곡동 소녀가 자리하고 있다. 당신들만큼 용기를 내어 살아오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그런 그들과 함께 글을 나눈다는 충만함이 교차하는 지점 위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이전만큼 낯설지는 않다.


그럼에도,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똑같은 고민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걸어온 삶의 궤적이 얄팍해서 나이만 먹었지 내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자괴감부터 이렇게 귀한 자리 하나를 내 것인 마냥 꿰차고 있어도 되는지에 대한 자문까지. 답이 없는 질문을 쏟아 내다 보면 어느덧 강남 한 복판에 서 있다. 한 층 한 층 계단을 오르며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자격지심을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슬쩍 덮어버린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똑똑 당신을 읽는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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