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동방지기

by 방재원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이십 년 가까이 펌프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들 펌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시나요? 맞습니다. 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유체(액체)를 빨아들여서 다른 지점까지 보내 주는 중개자인 셈이지요. 지금 여러분이 계신 건물 내벽에도 수많은 배관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그 사이사이에 펌프가 설치되어 유체가 원활히 흐르도록 해 주는 거지요.


제가 판매하는 제품에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펌핑이 되어 나오는 유체의 흐름이 반복적으로 끊긴다는 점인데요. 수도꼭지를 잠갔다 열었다를 빠른 속도로 되풀이한다면 이해가 되실까요? 이를 업자들 사이에서는 '맥동'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런 끊김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펌프 토출단에 맥동방지기(pulsation dampener)라는 별도의 기계를 설치해 주기도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동영상 링크를 첨부합니다. 다 보실 필요는 없구요. 58초 이후 구간만 힐끗 보시면 맥동방지기가 설치되지 않은 붉은색 물감은 펌핑이 될 때마다 뚝 뚝 끊어지는 반면에 녹색 물감은 계곡에서 시냇물 흐르듯 줄줄 나오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래프로 그려 보면 붉은 선은 심장 박동 뛰듯 위아래로 춤을 추는 데 비해 녹색 선은 사망 선고를 받은 환자의 바이털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D1_B56lQ2mw


근데... 왜 갑자기 난데없이 펌프 얘기를 꺼내냐구요? 하나는 마땅한 글감이 떨어졌기 때문이구요, 다른 하나는 환희부터 절망에 이르기까지 이번 책에서 다루는 수많은 감정들의 파도 사이에서 허우적 대는 저를 외면할 수 없더군요. 감정의 낙차를 감당하지 못해 제 마음 속 맥동방지기가 고장난 것 처럼 말이죠.


아침에 눈을 뜨면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면서 또 하루가 주어 졌음에 '감사합니다' 중얼거립니다. 출근 길마다 대리점 사장님과 비루한 네고 협의를 되풀이합니다. 얼마 안 되는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아이가 학교에서 잘 지내는지 아내와 카톡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 입니다. 오랜 시간 각성된 탓일까요... 느슨한 하루를 열었음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수풀이 우거진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으면 불어오는 바람결에 깜빡 잠이 들곤 합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휠체어가 접혀 있는지부터 확인합니다. 벽 거울 너머로 언뜻 보이는 아이가 축구공을 들고 "짠!"하고 나타날 때면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큼직막하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공 차는 재미에 빠진 아이와 땀을 뻘뻘 흘리며 드리블과 슈팅 연습을 하다 보면 길게 늘어진 저녁 햇살이 드리워집니다. 뻥. 저 멀리 온 힘을 다해 찬 공을 주우러 간 사이에 아이는 소리 없이 주저앉아 있습니다. 접어 두었던 휠체어를 펴고 숲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를... 소진하지 않겠노라 여러번 다짐합니다. 건널목 신호등이 깜빡거리면 종종걸음을 멈추고 잿빛 하늘을 바라봅니다. 전화 통화가 길어지면 말문을 닫고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습니다. 그저 한 걸음 떨어져서 되어져 가는 일들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무덤덤해지려는 스스로를 책망하기 보다는 아끼고 살피는 것. 그것이 지금 제가 아이와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기에 맥동방지기 전원을 켜 둔 채 오늘 하루만 바라며 살아갑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이가 무너진 마음을 세우고 두 발을 땅에 굳게 딛고 일어나는 그 날이 지나면 꾹꾹 담궈 두었던 다른 종류의 근심 걱정들이 슬며시 고개를 들 꺼라는 것을. 그럼에도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저는 숨 죽여 그 날만을 바라고 또 기다릴 따름입니다. 반성과 자책을 할 시간은 이후에도 충분히 있을 테니까요.


매번 이 공간을 제 신세타령으로 채우는 건 염치없는 짓입니다. 뻔하디 뻔한 어둑한 글로 읽는 분들께 공연한 피로감만 더해 드리는 것도 멈출 데가 되었습니다. 이 또한 자의식 과잉일 수 있지만 수개월 째 제자리 걸음하는 글을 올리면서 이 귀한 자리 하나를 제 것인 마냥 꿰차고 앉아 있어도 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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