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쿵 쿵 쏴아아
샤워실로 향하는 1호의 발걸음 소리를 모른 척하고 잠을 청하려다 불현듯 어제 참사가 떠올라서 애써 눈을 비빈다. 책가방 앞 주머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진라면 매운맛 십여 봉지.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밑바닥에 흩어져 있는 진홍빛 가루. 싱크대 창고 맨 안 쪽에 숨겨 놓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찾은 걸까? 매일 밤 실시간으로 주방 출입을 모니터링했는데 언제 먹은 걸까? 숨길 려면 제대로 숨기지 가방 속에 차곡차곡 모아 놓은 이유는 뭘까? 그마저 치우기 귀찮았던 걸까? 1호의 흥얼거리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분노 게이지가 다시금 상승한다. 또 핫바랑 삼각김밥 먹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지. 구겨진 몸을 일으켜 펴려는데 가위에 눌린 듯 꼼짝할 수가 없다. 두리번 동태를 살피고 왼쪽 팔을 베개 삼아 잠든 2호의 머리에서 간신히 손을 빼낸다. 배 위를 누르고 있는 3호의 다리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몸을 90도 비틀어 기어코 침대 간에 걸터 않는다.
쿵 쿵 쿵 띠리리
아들, 밥 먹고 가. 쾅.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문이 닫힌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를 끄고 화장실 바닥에 널 부러진 수건과 속옷을 주섬주섬 챙긴다. 애들 깨기 전에 커피라도 한잔 해야지 맥심 모카 봉지를 뜯는 순간 지이잉 [신한카드 승인 04/29 07:33 3,500원(일시불) CU 목동 6단지점.] 창 밖으로 보이는 편의점 주변을 어두운 물체 하나가 서성거린다. 제발 가글이라도 좀 하고 학교 가자… 옅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쉬이~! 3호의 부름에 창문에 기댄 고개를 돌린다. 아이가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 바지를 내리고 변기 위에 앉힌다. 볼 일을 다 보면 다시 한번 공중 부양하는 아이를 한 손으로 붙들고 다른 손으로 물을 내린다. 휠체어 위에 안착한 3호는 유유히 거실을 돌아다닌다.
내츄리닝바지어딨어?! 어제 놀이터에서 망쳐 왔길래 빨았지. 나이따멀리뛰기해서그거입어야돼. 오늘만 다른 거 입어. 아직 안 말랐어. 싫어. 다른건불편해서기록안나온단말야. 유독 검정색 츄리닝만 고집하는 2호는 기어코 빨래 대에 걸어 놓은 바지를 집어 든다. 아이씨,축축해. 그러니까 다른 바지 입으면 되잖아. 그러다일등급안나오면책임질거야? 머리나묶어줘. 내가 니 하녀니?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집어삼킨다. 2호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힘을 주어 머리를 질끈 묶어 버린다. 아침뭐먹어? 토스트 해 줄까? 아니면 어제 떡 사놓은 것도 있고. 무슨떡? 인절미랑 꿀떡이랑… 그거냉장고넣어놔서딱딱하잖아. 그럼 토스트 먹어. 초코잼은있어? 다 먹었어. 딸기 잼이랑 먹어. 그건싫은데. 그럼니맘대로 해!
뚱한 표정의 2호가 맨 식빵을 뜯어 손가락으로 돌돌 말아먹는다. 오물오물 옆 자리 3호가 인절미를 먹는 게 맛있어 보였나. 2호가 빛의 속도로 인절미 하나를 집어 먹는다. 왜내꺼먹어? 너두내꺼먹으면되잖아. 난빵싫어. 너두전에내꺼먹었잖아. 둘의 말다툼 너머 인절미가 접시 위에서 위태롭게 춤을 춘다. 윤아, 니 껀 따로 해줄 게… 앗! 노오란 분말이 허공에 떠오르고 잠시 후 내 머리 위에 소복이 쌓인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챈 2호. 나학교갈게 휭 나가 버린다. 까르르 3호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샤워기를 튼다. 욕조 배수구 사이로 누런 물이 흘러 들어간다.
엊그제 한 파마머리가 풀린 채 수건으로 감싸고 나오는 데 문 틈 사이로 빼꼼히 4호가 고개를 내민다. 애들 갔어? 힘 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러닝 차림으로 어슬렁 거실로 나온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서 폼 롤러에 몸을 실은 4호를 지켜본다. 무슨 일 있어? 대꾸하기 조차 귀찮다. 내가 준 책은 봤어? <상처받지 않는 영혼> 탁자 위에 며칠 째 같은 페이지가 펼쳐져 있는 게 못마땅했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덕담 아닌 덕담을 흘리며 손에 쥐어준 한 권의 책. 외부 세계, 그리고 내 안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에서 한 걸음 물러서면 고요한 참나의 자리에 머물 수 있다나… 난 니들이 좀 사라져 주면 굳이 참나가 아니더라도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차갑게 식은 커피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흥얼거리며 폼 롤러 위에서 뒹굴거리는 4호를 뒤로 하고 침실로 들어간다.
켜켜이 쳐 있는 암막 커튼을 걷어 낸다. 초록빛 잎사귀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모기장 틈새 너머 불어오는 바람결에 의지해 마음속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 본다. 창틀에 떨어진, 희뿌연 빛줄기를 머금은 연분홍 꽃잎 하나를 입술에 대고 속삭인다.
굳... 모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