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할 수 없는

<번지점프를 하다>

by 방재원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청초록빛 협곡 사이를 유유히 떠 다니며 당신은 이렇게 고백했지요. 100일 휴가를 나와 이른 아침 당신과 그녀(혹은 그)의 여정을 숨죽여 지켜봤습니다. 풋풋함과 먹먹함이 어우러지는 두 시간 동안 미동 조차 할 수 없었죠. 그리고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 키즈카페 한 구석에 앉아 조그만 네모창 속으로 다시 한번 당신의 발자취를 좇아 봅니다. 그새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기 때문일까요? 군청색 캡 모자 뒤에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감추고 싶었던 그 시절에는 납득할 수 없었던 당신의 선택을 앞 머리가 하나 둘 희끗해져 가는 지금에야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달빛이 속삭이는 숲 속에서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녀가 이끄는 대로 엉거주춤 왈츠 스텝을 밟았던, 폭우를 피해 찾은 여관방에서 멈추지 않는 딸꾹질 때문에 주전자 채로 물만 연거푸 마시던, 그녀의 얼굴이 새겨진 라이터를 앞에 두고 매캐한 연기와 싸워야 했던 당신은 지난날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수룩한 새내기 대학생이었습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연인과 헤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증발해 버린 그녀를 놓아 버리기엔 이미 당신 마음속 깊숙이 그녀의 자리가 아로새겨져 있었나 봅니다.


18년 전 그녀가 했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는 제자 앞에서 결국 당신은 오열하며 무너지고 맙니다. 마음이라는 건 때론 기울어진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숨을 헐떡이며 두 계단, 세 계단을 한 번에 뛰어올라도 결국에는 질질 끌려 내려오기 마련이니까요. 공고해 보였던 가족이라는 울타리, 동성 사제 관계라는 세상의 기준도 출렁이는 감정의 물결에 치여 덧없이 허물어집니다. 남들이 보기엔 음산한 행태일 테지만 당신에게는 늦게라도 다시 찾아온, 그래서 더 이상은 놓칠 수 없는 인연이었을 테지요.


그래서 더더욱 당신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함께 이국 땅을 밟았는데,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뜨겁게 사랑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질 않더군요. 또 한 번의 환생과 인연을 확신했던 걸까요? 윤회의 틀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저로서는 멜로의 외피를 쓴 불교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찜찜한 여운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제는 당신의 마음이 간신히 손에 잡힐 듯합니다. 어느덧 30대 후반의 교사가 된 당신은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으로 환생한 그녀와 재회했을 때 이미 예감했던 겁니다. 오랜 세월 사무치게 기다려온 사랑이지만 이 또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의 무게에 하나 둘 짓눌려 본래 형태를 찾아볼 수 없게 될 거라는 걸. 또 한 번의 이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살아 있음을 느낄 때 스스로 멈추고 싶었던 거였겠죠. 떨어져도 끝이 아닐 것 같다는 말을 반복해서 되뇌는 그녀 또한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밑을 내려다봐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흔들 다리 위에서 슬며시 로프를 풀고 당신의 손을 맞잡았으니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과 내가 동시에 사라져야 이별의 고통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모든 비극은 경험의 시간 차에서 오는 법.


가끔은 불온한 상상을 해 봅니다. 18년 전 쏟아지는 소낙비를 피해 그녀가 당신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 것처럼, 남은 생애 중에 누군가 제 마음속 우산 아래로 스며든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둘러 우산을 접어야 마땅하겠지요. 감당할 수 없는 비바람이 몰아쳐 접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녀와 다툰 후 땅바닥에 우산을 내리쳐 망가뜨렸던 것처럼 저 또한 그러해야겠지요. 마구 내던진 우산 살 하나가 끝내 제 마음에 와서 박힌다면... 그때는 저도 별 수 없네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왈츠 춤을 추며 번지점프대 위에 서는 수밖에.


* 이 영화에 출연하신 고(故) 이은주 님과 고(故) 전미선 님을 추모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낙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