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머니가 가장 예뻐하는 첫 손녀딸이었다.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기 전까지 대부분 할머니랑 같이 잤다. 할머니랑 자는 건 그 자체로도 좋지만 여러 가지 특권도 누릴 수 있었는데, 밤 10시 이후 티비 시청이 금지였던 영민과 숙경의 규칙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이 아주 쏠쏠했다. 할머니 앞에 누워 이불 틈으로 보는 티비의 맛을 아는지. 단연코 몰래 맛보는 유희가 제일 짜릿하다는 걸 일찍이도 깨우쳤다.
티비를 끄고도 잠이 안 오는 날이면 할머니랑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밤중이니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는 늘 입맛이 없었고, 질문은 자꾸 내게 돌아왔다. 그럼 난 신나서 먹고 싶은 음식들 이야기로 할머니 방을 가득 채웠다. 잡채가 먹고 싶다고 이야기 한 밤엔 다음날 식탁에 잡채가 올라오고, 불고기가 먹고 싶은 밤이 지나면 며칠 뒤 곧 불고기를 먹게 되는 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어린 날. 그때의 나는 할머니와 엄마의 긴밀한 관계 같은 걸 알기엔 너무 무구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젊은 숙경이 시어머니께 드시고 싶은 음식을 여쭤보아도 영 답이 없으시다가 가끔 말씀하신 것이 모두 내 입을 통해 나간 것들이었다. 숙경은 덕분에 메뉴 고민을 덜었다고 했으니 미안한 마음은 갖지 않기로 한다.
여러 손주들 사이에서도 할머니와 함께 잘 수 있는 것은 장손녀만의 특권이어서, 내 방이 생기고 나서도 굳이 밤만 되면 할머니 옆으로 베개를 안고 찾아갔다. 영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이쪽저쪽 부산스럽게 돌아눕기를 반복하다 보면 할머니가 가만히 있어보라며 바삭한 손으로 배나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더 이상 나와 밤새 먹고 싶은 음식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된 할머니는 병상에서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중에도 정신이 돌아오자 당신의 온 힘을 끌어모아 나를 불렀다.
지갑. 지갑.
왼쪽 아래 서랍에 있는 당신의 지갑 좀 가져다 달라는 뜻이었다. 단풍잎자수가 곱게 놓인 지갑을 할머니에게 가져다주자, 겨우겨우 입을 떼어 한 말씀이란,
귤. 사 먹어. 너. 귤. 좋아하지. 였다.
그런 겨울이 지나고 다시 또 오고. 돌고, 돌고, 돌고, 돌아, 또다시 왔다. 귤의 계절이.
이렇게 귤을 조금 먹은 겨울이 있었을까. 따뜻한 바닥에서 귤 까먹으며 연말 시상식 보는 게 겨울 최대의 낙이었던 인생에서 연말 시상식을 볼 정신도, 따뜻한 바닥에 앉아있을 시간도 없었다. 나 먹자고 장바구니에 귤 한 소쿠리 담을 여유 같은 건 있을 리 없었다. 새해에는 무슨 결정을 내려도 내려야만 했다.
사주와 신점을 봐야겠다.
가끔 재미로 찾아보던 신년운세 어플은 잊은 지 오래. 결혼을 할 때도, 자영업의 길로 뛰어들 때도 찾지 않은 장르. 비과학적인 통계의 스토리텔링보다는 내 직감과 판단을 훨씬 신뢰하는 쪽의 사람인 나는 애초에 그런 무속신앙을 막 좇는 편이 아니다. 사주를 곧이곧대로 믿는 스타일도 아니고, 신점을 맹신하는 타입도 아니다. 그러나 이혼을 앞두고 있다면, 게다가 좋아하던 일을 그만둘 고민까지 하고 있다면, 일생 일대의 기로에 선 지금 내가 사주와 신점 풀이 한 번씩 해본다 한들 누가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위로가. 어쩌면 해답이, 어쩌면 그저 용기가 절실했던 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찾아간 학교 앞 떡볶이집에서 우리가 즐겨 먹던 라볶이와 참치김밥을 먹었다. 대학생 때도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먹던 그 메뉴였다. 이제는 서로 바쁜 와중에 시간을 맞춰 굳이 찾아와야 하고, 이야기하는 고민의 무게도 제법 무거워져서 우리는 그때와 사뭇 달라진 듯싶다가도. 결국 떡볶이나 먹으면서 닥쳐올 미래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저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조금 더 늘어있을 뿐이었다.
떡볶이를 먹고 나서는 효창동에 처음 가보았다. 우리가 함께 처음 해보는 또 다른 경험을 위해서였다. 나는 이혼이 옳은 선택인지를 확인받고 싶었다.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건지. 삶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함께 한 그와 헤어지고도 나는 정말 괜찮을건지. 이대로 영원한 고통이 시작되어 버린 건 아닌지. 아니면 곧 끝이 보일 고통인 건지. 나는 다시 잘 살게 되는지. 그저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만한, 증명 가능한 일들이 매일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귀띔해 주는 미래는 성에 차지 않았다. 증명 불가한, 초월적 영역에서의 해답이 필요했다. 그냥 눈앞의 것은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인생 최초의 점집을 라마와 함께했다. 거북이로부터 그녀의 언니가 가볼까 싶어 받아두었던 곳의 연락처를 넘겨받고, 예약이 가능한 한 가장 가까운 날 만났다. 세상에 이런 무속신앙이라면 절대 믿지 않을 것만 같은 라마가 동행인이라니 사람 속은 참 알 수 없고 웃긴 일이다.
점집은 효창공원역 근처 어느 빌라에 가정집처럼 있었다. 무당언니는 우리를 보고 점 보러 온 게 처음이 아닌 것처럼 안 무서워한다고 했지만 사실 태연한 척하려고 엄청 애썼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용쓰는 모습마저도 훤히 알고 있을 것만 같은 그곳에서 나는 왠지 겹겹이 껴입은 옷들 아래로 속옷만은 벗은 채 서있는 기분이었다.
원래도 수수하고 억세 보이지 않던 무당언니는 점치기를 시작하자 눈빛이 새롭게 달라졌다. 변한 눈빛도 무서운 눈빛은 아니고 뭐랄까 눈동자가 촉촉하고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보이는 것을 술술 이야기해 주는 줄로만 알았던 신점은 생각보다 많은 대화가 필요했다.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무당 언니가, 자신이 모시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내게 전달해 주는 방식이었다. 잔뜩 쫄아서 의심과 경계로 시작했던 처음과는 달리, 신장이나 방광 쪽 건강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마음이 열려버렸던 것 같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이혼을 앞둔 부부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이야기들이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들었다. (물론 지금에야 하는 말이고 그때엔 어머어머 하며 들었던 것도 같다.) 기똥찬 예언이나, 소름 돋는 적중 같은 것보다는 드디어 무언가 결심이 내려졌다는 데에 인생 첫 신점의 의의를 두고 싶다.
점보는 순서의 마지막은 여러 차례 다양한 색깔의 깃발을 랜덤으로 뽑는 것이었다. 나는 빨간 깃발을 몇 번이나 뽑았다. 빨간 깃발은 조상과 관련된 깃발이라고 했다. 내가 계속해서 빨간 깃발만 뽑자 무당언니는 아까부터 저 쪽에 할머니 한 분이 점잖게 앉아 계시는데, 상스러운 욕을 하며 역정을 내시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계속 한숨만 쉬며 굉장히 속상해하고 계신다는 말을 전했다.
할머니일까. 그토록 속상해하는 당신은. 영혼의 존재가 저 쪽에 앉아있다는데도 두렵긴커녕 닿고 싶었던 당신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우리 할머니는 안타까운 일이 있을 때면 이크.. 에그.. 하면서 나지막이 삭히시는 분이었다. 누구보다 점잖으셨던 할머니. 살아계셨다면 가장 속상해하시며 에그... 하고 두 팔 가득 나를 안아주셨을 것이 분명한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지금 할머니 속은 억장이 무너졌겠지. 당신이 그리도 예뻐하던 내가 이렇게 슬퍼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신기하게도 마음속에서 어떠한 용기가 생겨났다. 적어도 이런 모습은 하늘에 계신 할머니가 슬퍼해서라도 보이면 안 될 것이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나를 잃어서는 안된다. 너의 불행을 위해 나의 터전에 불을 지피는 일. 그런 것엔 관심따위 두지 않는다. 할머니 옆에 누워 밤새 세상을 꿈꾸던 아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었다.
그래. 나는 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