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맑은 볕

by 둥둥

인스타그램에서 ~식으로 이름 짓기가 유행처럼 번졌다. 조선시대식 이름 짓기, 공대식 이름 짓기 같은 건 한번 보고 웃어 넘기기 그만이었지만 인디언식 이름 짓기는 실존했던 방식을 따른 건지 제법 진지해 보였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몇몇의 생년월일을 대입하여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말 많은 양의 파수꾼. 욕심 많은 불꽃은 나의 친구. 욕심 많은 돼지의 노래 등 내 친구들은 대부분 시끄럽고 말 많거나 욕심이 많은 운명이었고, 꼽아본 중 이미지가 비슷하게 그려지는 이름은 시끄러운 황소를 쓰러트린 자와 욕심 많은 하늘의 행진 정도였다.

나는 욕심 많은 매의 일격. 지금 세상에서는 다분히 과한 이름이지만 인디언으로 태어났더라면 썩 용맹스러웠을 내 이름이 마음에 든다.


푸른 양의 심판자는 태어난 생년월일로 주어지는 숙명적 이름 대신 당신의 부모님께 ‘맑은 볕’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맑을 숙, 볕 경. 숙경.

새삼 뜻을 되짚어보니 너무도 숙경스러운 이름이라 놀랍다. ‘맑다. 깨끗하다. 착하다. 어질다. 얌전하다. ’ 는 의미의 숙. 숙경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맑은 어른이다.

숙경의 성품은 깨끗하고 맑은 햇살 같다. 맑기에 속내가 훤하고,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속은 대부분 명랑해서 애초에 감출 생각도 없다. 그런 숙경은 남을 잘 믿는다. 자신이 투명한 만큼 남들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하는 이의 말이라면 하늘이 바다라고 해도 믿을 숙경. 종종 숙경의 세상에 더 나쁜 마음을 먹은 이들이 등장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딸이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겠다며 이야기를 꺼냈을 때. 숙경은 딸이 고른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예비 사위를 무턱대고 좋아해 버리기 시작했다. 이미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장모의 눈에 비친 사위는 그저 귀엽고 살가운 또 하나의 아들이었다. 딸과 함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요~ 같은 동화 속 사랑의 엔딩을 함께 할 사위를 숙경은 철석같이 믿었다.

한 살 더 먹은 딸은 그런 사위와 함께 이제 결혼 6년 차가 되는 낡은 신혼부부가 됐다. 숙경은 새해 인사에서 슬며시 기대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와 나 사이에 벌어진 사건의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숙경이 덜 놀라고 조금만 슬플까. 어떤 말로 운을 띄울지 말을 고르는 사이에도 숙경은 야근과 출장이 부쩍 잦아진 사위의 건강과 스트레스를 염려하느라 바빴다. 모두 그의 부재마다 어설픈 말로 둘러댄 내 탓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애정을 가득 담아 걱정하는 숙경을 나는 더 이상 기만할 수 없었다. 당신의 기대에 차질이 생긴 정도만이라도 알려야겠다 싶었다.



- 아기 갖는 건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

- 왜?! 어디 몸이 안 좋아?

- 아니! 음.. 그가 좋은 아빠가 될 준비가 됐는지 아직 확신이 안 서는 것 같아

- 그렇구나. 어떤 부분이?

- 음… 책임감 있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



이만큼 들었을 때 이미 숙경은 이상을 감지했다. 짧게 침묵이 흘렀다.




음… 우리 딸이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엄마한테 말해 줄 수 있겠니?




숙경의 목소리에 난 그만 평정심을 잃었다. 따뜻하고 탄탄한 목화솜 수십만 겹이 쌓여 넓은 바다만큼 펼쳐진 듯 했다. 무엇이든 좋으니 다 말해보라는, 무슨 일이든 내가 너의 뒤를 지키고 있다는 듯한 그 목소리를 들으니 애써 무장하고 있던 k장녀의 의젓한 애티튜드 대신 이를 데 없어 서러움을 꾹꾹 참고 있던 딸의 자아가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대답 대신 먼저 눈물이 맺혔다. 이렇게 오늘 다 말해버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 나온 김에 다 해버리는 게 낫겠다 생각하니 짧은 순간 심장이 쿵쾅댔다. 숙경이 감지한 이상에 딸의 이혼 결심도 있었을까.



놀라지 말고 들어, 로 입을 뗐다. 그건 앞으로 펼쳐질 놀랄 일에 대한 경고였다. 숙경에게 차오른 눈물과 요동치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짧고도 긴 몇 달간의 이야기를 쭉 털어놓았다. 숙경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해서 세부 스토리는 최대한 정제하여 담백하게 말했다. 맑디 맑은 숙경은 고통과 상처에 티 나게 취약한 편이었으므로 숙경의 슬픔을 보는 건 내게 또 다른 큰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다 들은 숙경에게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숙경의 관심은 오직 내게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딸이 괜찮을지. 홀로 버텨온 시간이 안쓰러워 애가 끓을 뿐이었다. 그런 숙경 앞에서 나는 센 척했다. 이제 괜찮다고. 계획도 다 세워놨다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나의 센 척이 숙경에게 소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엄마아빠한테 진작 말하지. 혼자서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어.. 하며 숙경은 말 끝을 흐렸다.


수화기 너머로 모녀는 잠시 함께 있는 듯이 흐느꼈다.

숙경의 투명한 속내가 푸른 눈물로 가득했다.












keyword
이전 12화사랑은 모일수록 짙어만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