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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속 말들

by 둥둥

처음으로 엄마가 나 때문에 슬플까 봐 걱정했던 건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진실게임에서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필 그 남자애는 나 말고도 우리 반 여자애들 다수가 좋아하고 있던 애여서 문제가 됐다.

5학년때의 나는 공부를 잘했고, 학교를 대표하는 아나운서였고, 반장이기도 했으며, 합창부에다가, 우리 반에서 키도 제일 컸다. 기회만 있다 하면 전교에서 상도 가장 많이 받는 애가 인기 많은 남자애의 마음까지 가져가자, 제일 가까웠던 친구들은 한순간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때에도 나는 나 싫다는 친구들은 그러라 그래~라는 마인드로 가도록 내버려 두고, 나를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과 새로운 유대를 쌓았다.

그중에는 학교 앞 문구점인 ‘보물섬’의 딸이 있었다. 나는 보물섬에서 떡볶이 한 컵 씩을 매일 사 먹는 우수 단골이어서 보물섬 아줌마와도 꽤 친분이 있었다. 근데 그 보물섬 아줌마가 친구의 엄마라는 게 (정말 감사하지만, 그 당시 잠깐) 문제가 됐다.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던 보물섬 아줌마가 우리 엄마에게 살짝 변동이 생긴 나의 교우관계에 대해 귀띔을 해 준 것이다.

나는 그날 엄마가 나 때문에 우는걸 처음 봤다. 시험을 못 봐서도 아니고, 대차게 넘어져서도 아니고, 같이 놀던 친구들 몇 명이 사라지자 엄마는 나를 안고 울었다.

그때는 숙경이 왜 울기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지금은 안다. 5학년 꼬맹이는 실체를 모르고 참기만 하던 슬픔의 종류를 숙경은 알았던 것이다.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빼고, 엄마의 눈물을 보는 일이란 흔치 않아서 나의 슬픔보다 숙경의 슬픔을 더 걱정했다. 걱정은 하지만 당신이 느끼는 슬픔은 오롯이 당신의 몫이라는 것을, 그것을 내가 어찌해 줄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커가면서 알았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종종 당근과 채찍을 고루 상납하는 딸로 자라났다.

중학교 때까지는 시골에서 꽤나 공부를 잘해서 내내 기쁨을 주었던 딸. 들어가기 어렵다는 고등학교에 준비도 없이 합격했을 때, 한 상 거하게 차려놓고 신나 하던 영민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따라가기 버거워하는 나를 보며 나보다 더 크게 심란해하고, 미안해하고, 걱정하던 숙경과 영민이었다. 그 시간이 숙경과 영민에게도 얼마나 깜깜했는지는 당신들이 써 준 숱한 위문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지내고, 아쉽고 후련한 마음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염원하던 과에 들어간 스무 살의 둥둥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헤엄치며 밤낮없이 꿈을 꿨다. 너무 멀리 헤엄쳐서일까, 너무 달콤한 꿈을 꾸어서일까. 어느 날 졸업 후의 현실을 생각하게 되고부터는 한동안 유영을 멈추고 고민한 끝에 그 좋아하는 전공 살리기를 포기했다. 학비도 비싸기로 손꼽는 대학에 들어가 놓고 이토록 가성비 떨어지는 결정이라니. 기대감만 잔뜩 높여놓고 영 성과 없는 주식. 그게 바로 나였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하고 싶은 것이 선명했고, 함께 하고 싶은 이도 꽤 오래 굳건해서 남들보다 조금 일찍 결혼하고, 덕업일치를 이루어 사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이 도란도란 예뻐서 이제 좀 걱정을 내려놔볼까 하는 찰나에 안겨준 게 손주 대신 이혼 소식이다.


숙경의 말을 전해 들은 영민은 당장 대전에 내려오겠다고 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보이지 않는 덫에 걸린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때 모든 판단이 흐려진다고. 지금 사위가 그런 것 같다고. 그럴 때 어른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라고. 알려주고 꺼내줘야 한다는 게 영민의 뜻이었다.

그는 정말 덫에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그를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 모습이 꾸며지지 않은 그의 맨얼굴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날들이었다.

사위를 찾아가겠다는 영민을 한사코 말리니 영민은 그럼 사돈을 찾아가겠다 했다. 아버지의 말이라면 아들도 다르게 들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적당히 편집하여 전해 들은 내용으로 세세한 스토리는 모르니 보일 수 있는 아버지로서의 반응이었다.

영민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뜻이 완고했다. 자신의 부모에게는 우리의 결정을 모든 이혼 절차 후 말씀드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의 계획이란 이혼이 지체 없이 진행되어, 이 정도 선을 지키며 더 뜨겁지도 더 차갑지도 않게 지내다 탈 없이 헤어지는 것이었다. 이혼 후에도 일 때문에 당분간은 한 집에 살아야 하므로 서로에게 더 이상 감정 상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뭐로 보나 좋았다. 나는 이미 수용 가능한 슬픔의 한계치를 매일 마주하는 중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해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중이었다.

그를 겨우 만류하여, 결국 처음으로 법원 가기 전날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 이혼을 알렸다.

스튜디오에서 어질러진 꽃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그가 전한 소식을 들으신 어른들은 갑작스러운 통보에 놀라시긴 했지만 어느정도 감을 잡고 계셨던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정해진 운명을 앞에 두고 당신들과 나눌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었다. 그동안의 정 만으로도 서로에게 한 켠에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을 터였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그 마음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침묵 사이로 무수히 많은 괄호 속 말들이 오고 갔다. 괄호 밖에 있어서 남은 말들은 슬펐다.

네가 간장게장 좋아한다고 해서 이번 겨울에 오면 해주려고 했는데 결국 그거 한번 해주지도 못했구나.

올 겨울 유독 춥다는데..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인연의 끝은 퍽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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