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꿋꿋한 다정

by 둥둥

잘 잤다. 온수매트가 보글보글 뎁혀준 간밤의 잠자리에서 나는 혀 끝으로 조금씩 솜사탕을 녹여 먹는 단 꿈을 꾸었다. 암막커튼으로 완벽하게 어두운 방 안을 어깆어깆 휘젓고 거실로 나간다. 북성교회 지붕 위로 흩날리는 눈발. 속도 없이 참. 예쁘다.

날리는 눈을 만져보고 싶어 베란다 문을 살짝 연다. 열린 문 틈으로 팔꿈치를 쭉 펴자 찬바람 한 줄기와 함께 눈송이 몇 개가 둥실 밀려온다. 몽근하게 데워진 손바닥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눈. 투명하게 녹아버린 이 액체는 방금 전까지 희고 반짝이던 눈이었다. 금방 사라질 줄도 모르고 영원할 것처럼 송이에 송이를 이어 떨어지는 눈. 동화처럼 평화로이 눈 내리는 이 장면을 빨리 전하고 싶다. 어젯밤 내 옆에서 잔 애한테.

언제라도 갑자기 그쳐버릴지 모를 눈.

아름다운 건 언제나 유한하다.


야. 일어나 봐. 눈 왔어.


나지막이 달뜬 목소리. 눈소식을 전하니 일어나라는 애는 안 일어나고, 침대 아래쪽에서 그 애의 남편이 먼저 반응한다.


그래애? 눈이 왔어어?

어. 지금도 와. 빨리 일어나 봐.


내 옆에서 잔 애는 감은 눈 덕분에 더 희고 동그래진 얼굴로 그제야 가느다랗게 입을 연다.


안보이잖아아.


눈이나 뜨고 말하렴 얘야. 십분 쯤 미적대다 몸을 일으켠 애와 그 애의 남편과 나. 우리 셋은 베란다에 나란히 서서 눈을 구경한다.


우와 진짜 예쁘다아.

진짜 예쁘지!

그러게에. 눈이 진짜 예쁘게 내리네에.


아름다운 순간에 서른네 살들은 네 살처럼 말한다.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하염없이 바라보는 네 살 같은 서른네 살들.


커피 마시고 싶다.


네 살은 알 리 없는 눈 오는 아침의 따뜻한 커피 맛. 서른네 살은 모두가 아는 그 맛이 떠오르자 셋은 아침을 차리기로 한다. 한 명은 원두를 곱게 갈아 커피를 내리고, 한 명은 노릇하게 토스트를 굽는 풍경. 나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멋쩍어 테이블을 좀 정리한다. 지난밤에 늘어놓은 휴지 뭉치들을 주섬주섬 모은다. 펄펄 내리던 눈이 푹푹 내리기 시작한다.


간밤에 우리는 새벽까지 와인을 마셨다. 아르헨티나산 포도로 만든 두 번째 와인은 은은한 가죽 냄새와 묵직하게 익은 검은 자두향이 초콜릿향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스모키한 와인이었다. 잔에 담긴 검붉은 와인을 빙빙 돌리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친구들은 내게 이제 울으라 했다. 너무 안 울어서 병이 날까 봐. 얘네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요즘의 나는 너무 많이 울어서 조만간 쌍꺼풀이 생길까봐 걱정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더 울어야 병이 안 날까.


어제 그와 또 답이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제발 자기를 잡아줄 수 없냐는 말은 역시 모두 거짓이다. 진심은 행동에서 나오니까. 그래도 저런 말들 덕택에 헤어지기로 한 마당에도 우리는 꽤 괜찮게 지냈다. 몇몇 순간들만 제외하면. 어제는 그 제외된 몇 순간이 펼쳐진 날 중 하루였다. 누가 믿을까.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향해 악에 받친 소리도 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 조차도 믿을 수 없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때마다 놀라고 겁나지만 이내 곧 생각한다. 어느 순간에도 나를 잃지 말자.


이번 주말엔 집에 있으려 했다. 눈치 보느라 얼어있는 사월이와 마음껏 놀아주려 했다. 그가 없는 텅 빈 시간을 꼭 혼자 견뎌내보려 했는데. 또 이렇게 지고 말았다.

져버린 순간이 오면 혼자 외로울까 봐 알과 공룡은 항상 먼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넘어지는 순간마다 그들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낮이건, 밤이건, 토요일이건, 일요일이건 그들은 항상 거기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시도 때도 없이 버스를 타고 올라가 공룡과 알을 만나는 날들. 그럴 때면 영락없이 우리는 함께 맛있는 걸 먹고, 밤을 맞고, 밤이 하얗게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셋이 함께 아침을 맞았다. 나는 알의 자리에서, 알은 공룡의 자리에서, 공룡은 알의 옆 바닥에 펼친 이부자리에서.


이 겨울 동안 내가 그들을 찾은 건 대부분 시린 때였다. 화나는 현실을 무턱대고 잊고 싶을 때. 방황하던 마음이 지치고 고단할 때. 스스로의 모습이 처량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럼에도 얘네 앞에서 나는 꽤나 단단해 보였던 모양이다. 우리 딸 멘탈이 너 같으면 좋겠다고 하는 걸 보면.

그러나 나의 딸은 더 세찼으면 하고 소망한다. 더 강해서 더 크게 소리 지르고 더 모질게 내동댕이쳐도 마음에 남는 상처 하나 없이 후련하기만 한 애였으면. 참지 않았으면. 통쾌했으면. 그동안 너무 안 울었으니 이제 좀 울으라는 말에야 겨우 겨울비 같은 눈물을 적시는 딸이 아니라. 한 여름 소나기 같은 울음을 한바탕 쏟아내고 야무지게 걷어붙인 두 팔로 그들을 쫓아가 무어라도 쥐고 흔드는 딸. 대차게 뺨이라도 날리거나, 모두가 알게끔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거나, 하다못해 욕지거리라도 시원하게 퍼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딸이었으면. 일기장 한 페이지에 저주스러운 한 줄 달랑 적어놓고 마음 불편해하는 나와는 달랐으면.


푹푹 내리던 눈이 폴폴 내린다. 크림치즈를 바르고 샤인머스켓을 정성스럽게 올린 오픈토스트가 완성됐다. 우리는 금세 먹고 그 자리에서 오래 웃고 떠든다. 따뜻한 커피가 식을 때까지. 폴폴 내리던 눈이 그칠 때까지. 점심 메뉴는 무얼 먹으면 좋을지 같은 시시한 고민이나 하면서. 그럼 저녁 메뉴부터 정해야 한다는 실없는 농담이나 하면서. 오늘은 다시 돌아가야 하는 내가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처럼 그렇게.




나의 유약한 마음으로 이만큼 꿋꿋하게 지날 수 있는 것은 모두 너희 덕분이다.

온전히.

내곁의 당신들 모두의 다정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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