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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하는 마음

by 둥둥

라디오 두 시의 데이트에서 안영미가 뮤지를 불렀다. 너무 다급하게 부르는 바람에 놀란 뮤지가 얼른 답하자 안영미는 냉큼 준비했던 말을 뱉는다.


내 더위 다 가져가라!


어이없어 헛헛 웃는 뮤지와, 더위 판 일이 뿌듯해 한참을 두고 꺽꺽 웃은 안영미. 라디오 소리가 퍼지는 차 창 밖으로는 눈이 오고 있었다. 정월대보름이었다. 새파란 추위에 한 해의 더위를 파는 일이 난데없어 웃음이 났다. 도대체 이런 귀여운 일은 누가 먼저 시작해서 아직까지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는 걸까?


우습지만 귀여운 일들을 좋아한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비는 일이라던가, 손 끝에 봉숭아 물을 들이고 첫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일. 굴뚝 없는 집에 살면서도 크리스마스 양말을 벽에 걸고 산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일 같은 것들. 때마다 둥글게 찬 달을 보며 소원 비는 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습지만 귀여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유독 커다랗고 노르스름하게 훤히 뜬 달은 왠지 더 넉넉히 소원을 들어줄 것 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부풀어진다.

정월대보름의 꽉 찬 달. 어제와, 어제의 어제와, 어제의 어제의 어제와 같은 달일지라도, 이 날 이 달을 핑계 삼아 굳이 소원을 빈다. 바라는 것이 많은 이는 그 어떤 기회라도 놓칠 수 없다.

나는 오늘에야 말로 소원을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잠겨있던 어떤 단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함께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왔을 우리. 오늘 하루 새롭게 들은 신기한 이야기를 전해주거나 주말에 뭐 하면 좋을지 같은 것을 맞춰보면서 동네 한 바퀴를 어슬어슬 걸었을 우리. 걷다가 하늘이 넓다랗게 보이는 아파트 뒤쪽의 공터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나란히 서서 각자의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적응해야 한다. 나와 함께 달을 보며 같은 소원을 비는 그는 이제 없다는 현실에. 다른 세상에서 바쁜 그를 방 문 너머에 두고 나는 혼자 아파트 뒤편으로 나왔다. 넓은 공터에서 추위를 견뎌내며 달을 보려고 서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젖히고 달을 봤다. 은쟁반처럼 눈부신 달이 영롱하게 떠있었다. 누가 볼까 조금 신경 쓰였지만 선명한 달의 무늬를 보고 있자니 그런 것들은 금세 잊게 됐다.


투명할 것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달을 보며 비는 소원. 나의 소원빌기 의식은 정해진 양식 없이 언제나 제멋대로 이뤄진다. 가끔은 이렇게 두서없는 소원을 누가 제대로 들어줄 수 있을까 싶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빌고 싶은 대로 빈다.

보통 카운트다운이 없어 느긋하게 소원을 빌 수 있을 땐 하늘에 계신 모든 신을 찾으며 내 주변을 두루 살피는 소원부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바랐던 가족의 건강이랄지, 번갈아가며 염원하였던 나와 남동생의 대입이나 취업 같은 것. 영민의 어깨가 무거워 보이는 시즌이면 영민의 짐이 덜어지길 바라는 소원을 빌고, 숙경이 유독 걱정이 많아진 시즌이면 숙경의 걱정이 덜어지길 바라는 소원을 한꺼번에 비는 식이었다.

시간이 없을 때엔 두루뭉술하게 우리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것으로 퉁친다. 마음속으로 바쁘게 소곤거려 보는 소원들은 질서도 없이 어수선하지만 대부분 소원을 비추는 방향이 우리를 향해있다는 것만은 늘 일관되게 명료했다.


그러나 오늘의 소원은 철저히도 나를 향한 것이었다. 우리 중에서도 특히 응원하고 싶은 나만을 위한 것. 구태여 단단한 마음으로 소망하는 것. 흩어지지 말고 꼭 달에게 닿으라고. 달님, 당신은 헷갈리지 말고 정확히 들어, 꼭 이루어지게 해 주시라고. 또박또박 한 가지 소원만을 정성껏 빌었다. 이 소원은 달이 이지러지고 차지길 반복하는 여러 날 여러 해 동안 달 끝 어귀에 걸려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라는, 강렬한 열망보다는 은은한 염원 같은 거였다.

간결하고도 깊은 소망이 마침내 달에 닿았을 때 달은 아주 조금 더 밝게 빛났다. 어제는 그냥 지나쳤을 달. 내일도 올려다보면 그저 밝네, 하고 지나칠 달을 머리 뒤편에 두고 집으로 돌아오며 굳이 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굳이 소원을 비는 마음에 대해. 굳이 안부를 전하는 마음에 대해. 굳이 밥 한 끼 함께 하는 마음에 대해.


굳이 하게 되는 일에는 보다 큰 마음이 담겨있다. 한번 더 들여다보고 그럼에도 위하고 싶은 마음. 아마 사랑과 비슷한 모양이겠다.

굳이를 실천해 준 당신들의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굳이스런 행동으로 마음을 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이왕이면 그런 날이 자주 있기를. 넉넉하고 휘영청한 달이 되어 당신들에게 밝은 빛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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