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소음

멋대로 소음이라고 단정 지었다

by 이탈자 연대

원룸에선 보일러와 냉장고 소리, 가끔 빨래를 돌릴 때 나는 세탁기 소리, 밖으로 나오면 도로의 수많은 차와 엔진소리, 수많은 사람의 대화 소리 등 잠을 청하기 전까지 수많은 소리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이 아닌 대부분의 소리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소음’이라는 범주에 들어간다. 듣는다고 별로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고 정신 사납게 하거나 머리만 아플 뿐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퇴근을 기다리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듣기 싫은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인 거 같다. 출퇴근길에 버스와 지하철에서 각종 소리를 마주하고 있으면 두통이 오는 기분이다. 집이든 회사든 얼른 목적지에 도착해야 듣기 싫은 각종 소음에서 벗어난다. 혼자 카페든 식당이든 갈 때면 요즘은 가장 조용한 곳이 제일 나은 선택이다. 이젠 시끌벅적한 장소에 있으면 집중이 안 되고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소음‘을 정의하는 기준은 주관적이다. 사실 본인이 듣기 싫은 불특정의 소리를 갖다가 인간은 소음이라 정의하고 불쾌감을 드러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듣기 싫고 더 이상 안 들리게 하고 싶다면 소음이고 불쾌할 뿐이다. 심지어 사람의 말도 때에 따라, 혹은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소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자기가 듣기 싫고 의미를 두지 않겠다면 말이다.


오늘도 종로 한복판에서 시위대 행진이 벌어진다. 확성기에 대고 울려대는 여러 외침을 들으면서 대부분은 시끄럽다, 소음공해다 등등 뒷말이 많다. 실내에서는 밖의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고 웅얼거리는 식으로 왜곡되는 탓에 정확히 무슨 말인지 들을 수가 없다. 이러면 거리의 소음에 묻혀서 그냥 다른 소음이 되어버린다. 시위대가 말하고 싶었던 말의 의미가 사라진 채로 말이다.


인간이 대화하려면 귀를 기울이고 말을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듣기 싫은 소리라면 집중이 안 되고 귀의 방향도 멀어진다. 점점 물리적인 거리도 벌어지며 말의 의미마저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렇다면 듣고 싶은 사람의 말이란?


사람 자체가 보고 싶거나 애정을 쏟는 상대일 경우, 아니면 말 자체가 듣기 좋거나 듣는 사람의 욕망을 충족해 주는 경우가 해당한다. 그렇다면 듣기 싫은 사람의 말은 이걸 뒤바꾸면 되지 않을까. 악의를 갖고 악담과 비방을 퍼붓는 사람을 좋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었다 한들 감정을 잔뜩 실어 말하면 듣는 쪽에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오은영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듯이, 대화하려면 상대방에게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처음에는 예의상 경청해서 듣고 대화에 응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대화가 원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면, 비즈니스나 협상 자리가 아닌 대부분은 감정이 개입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표정과 말투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이다 보니 말의 본래 뜻에 집중하기 힘들어진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거슬림이 계속 느껴지다 보면 불쾌함이 되고 격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악으로 흘러가면 그 사람의 말은 소음으로 규정되어 인간의 눈과 귀에서 차단되고 만다.


어찌 보면 사람이란 참 이기적인 존재다. 보고 듣는 모든 걸 자기감정에 따라서 이해해 버리니 말이다. 근데 결과적으로 따지면 이것도 다른 사람한테 영향받아 이렇게 되어버린 셈이다. 인간이 서로 이렇게 불편해진 게 우리가 걸어온 길이었다면, 그 반대로 가는 길은 없었을지 스스로에게도, 우리 사회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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