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8)
작가의 말 : 매일 꾸준히 하루에 3000자. 구독자가 늘려면 몇 년이 걸릴까요?
"220억 있으십니까?"
베를레인 경매장의 구석에서 패들이 수십 개 올라온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 적정 가격대에 진입했으니 털어내야 한다. 던은 손바닥을 펴 정면으로 뻗으며 다시 외쳤다.
"235억 3000만 있으십니까?"
단숨에 호가를 15억 3000만 원이나 올렸다. 패들의 주춤거림이 던에게까지 느껴진다. 다시 빠르게, 호가 간격을 낮추어 리듬을 올린다.
"235억 3200만 있으십니까?"
단지 200만 원만 올랐을 뿐이지만 좀 전의 큰 간격의 호가 뒤에 나왔기에 경매참여자들에게는 235억이라는 거대한 숫자만이 인식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던은 다시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외쳤다.
"235억 4500만"
오락실 구멍 속 두더지처럼 일정하게 올라오던 번호패들이 어느새 반도 남지 않았다. 슬슬 마무리를 지을 때다. 던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잠시의 틈을 준 뒤 옆으로 발을 내딛으며 나지막이 그럼에도 똑똑히 한 글자씩 집중해 말했다.
"260억 1200만"
뒤의 1200만은 미끼 숫자다. 호가 간격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260억으로 맞추어 부르면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아 많이 오르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남은 패들은 2개, 텍사스 홀덤으로 말하면 이른바 헤즈업이다. 이때는 천천히 적당한 간격으로 고민할 시간을 충분히 주며 호가를 불러야 한다.
"262억"
"262억 1000만"
"262억 1200만"
"262억 1240만" 승부가 났다. "낙찰입니다." 던이 입을 일자로 오므리고 가벨을 경매패드에 두드렸다. 낙찰을 결정지은 가격은 262억이라는 거대한 단위가 아니다. 언뜻 보면 사소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40만 원. 아마 이들에게 한 끼 식사 값도 안 되는 작디적은 금액. 이 금액이 낙찰을 결정지었다.
사무장 메이가 떠나가고 2개월, 아직 새로운 사무장은 들어오지 않고 던이 거의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다. 아늑하지만은 않은 감정실의 퀼팅 소파에 회색빛 단발머리의 여인과 던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하얀 트위드와 주름진 목을 가리려는 듯 빈틈없는 롱스카프, 던은 여인의 검은 롱스카프를 보며 메이를 보냈던 검은 숲벽 안 공간을 그려보았다. 여인은 머리칼을 귀로 쓸어 넘긴 후 트위터를 벗어 소파에 단정히 벗어 놓았다. 트위터 안의 스퀘어 넥의 티가 고급스러운 캐시미어 스카프와 잘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품 있는 여인에게 영향을 받은 듯 던은 차분히 말을 건넸다.
"그림을 사야만 했던 이유를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한 문장 혹은 단어여도 괜찮습니다. 적절치 못한 이유라고 해서 낙찰이 취소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난봉꾼 아버지를 따라다녔던 잔의 둘째 딸인 코샤는 그리 좋은 환경에서 자란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어머니 잔은 일찍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남편은 가정에 관심이 없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몰라도 항상 술과 도박에 빠져 살며 툭하면 돈을 마련해 오라고 아이들을 집에서 내쫓았다. 그의 몸은 항상 술로 덮여져 있었기에 바깥공기의 차가움은 느끼지 못했다. 코샤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떻게 서든 돈을 들고 들어가야 했어요. 아무리 가리지 않고 날아오는 벨트질이 난무하는 집이어도 바깥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비하면 견딜만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10살 꼬마 아이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코샤가 던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여윈 몸과는 다르게 목소리에서는 고상함이 느껴졌다.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던은 짧게 대답하며 보육원의 아이들과 함께 어쩔 수 없이 털 수밖에 없었던, 그 전당포를 떠올렸다. 가벼운 두통이 일어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댄다. 전당포의 구석에 마련된 작은 방의 켜진 티브이와 그 앞에서 누워있던 노인은 과연 잠에 들어 있었던 것일까. 신이 난 듯 금반지를 이리저리 껴보던 노아의 얼굴도 떠올랐다.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동시의 기억이 지속되고 있다.
"제 언니와 동생들은 무작정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시작했어요. 가끔씩 무표정으로 날아들어오는 동전들이 꽤 쏠쏠했던 모양이죠. 처음엔 저도 그들과 함께 했어요. 특히 투명한 창으로 내부가 비치는 음식점 벽에 기대앉아 있는 것이 효과가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유리 속 단란한 가족들과 대비가 되니까요. 술 한 두 명을 살 돈이 모이면 아버지는 꽤나 기뻐하며 저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어린 동생들과 언니는 그런 몹쓸 아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한 눈치였죠. 저는 달랐어요. 구걸을 하는 위치에 따라, 시간에 따라, 표정에 따라 들어오는 돈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된 시점부터 저는 따로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여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던은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나타내기라도 하려는 듯 깍지를 끼고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이유는 단지 부모가 가난하다는 사실 때문은 아닌 듯합니다. 아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인식할 기회조차 그러한 환경에 모조리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겠죠. 저 또한 길거리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지금 제가 앉아있는 자리는 이 소파가 아니라 빈민가의 다리 없는 딱딱한 녹슨 의자겠죠. 한동안 아버지의 날아오는 벨트를 견디며 사람들을 관찰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선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어야 했습니다. 신선한 바게트, 따뜻한 울 소재의 코트, 생계를 유지할 일자리. 제 경우에는 제 몸밖에 없었죠. 아침이면 길거리에 나가 여러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와 가사를 외웠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 노래를 불렀죠. 쥬엘 광장에서 저를 보려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아버지에게 받치는 돈을 제하고도 따로 숨겨둔 돈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가증스러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할 때쯤 언니와 동생들과는 거리고 멀어졌고, 전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코샤는 수도원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떠올렸고 당당한 미래 속 자신의 모습이 그녀에게 끊임없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성인이 된 그녀는 구체적인 그림은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일굴 자신만의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카바레에 들어가 노래를 불렀다. 구체적인 낙관인지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녀를 알아보는 한 장교를 만나게 되고 코샤는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코샤의 남다른 독립심은 그녀를 다른 사교계의 여인들과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주었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당연스럽게도 그런 그녀를 알아본 후원자가 나타났고 그의 도움을 받아 모자가게를 오픈했다.
"사람 일 참 모를 일이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스스로 돈을 모아 제 가게를 열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후원자가 나타난 거예요. 아마 후원을 받지 않았다라면 제 힘으로 혼자 가게를 오픈할 수 있었을까, 하고 종종 생각하곤 합니다."
던은 떠올린다. 끝끝내 외면을 받은 자신의 작품들과, 시간을. 우연의 바람이 아직 자신에게 불어오지 않을 뿐인가, 하고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가능했으리 생각됩니다."
6년 전 반구형의 전시회장에서 만난 그 남자가 말한다. "너의 작품은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어"
"제 이름을 넣어 오픈한 모자 가게는 금세 인기를 끌었어요. 순식간에 얻은 인기는 사교계 여성들에 있어 하나의 상징적인 패션이 되었죠. 당시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활동을 꼽으라면 아마 누구나 승마를 떠올리거에요. 저 또한 승마를 했죠. 당시의 옷은 너무나도 불편했어요. 그래서 저는 남자처럼 재킷을 걸치고 옷을 리폼해서 말 위에 올라탔습니다. 상류층의 취향은 이해하기 힘들어요. 단순히 편리함을 추구한 제 복장은 모자와 마찬가지로 유명해졌죠. 이목을 끌만한 무언가를 추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코르셋을 없앴을 뿐, 그뿐이었어요. 저는 사업을 확장하기로 했어요. 손에 지폐향을 감별하는 자석이 붙은 듯 끊임없이 돈이 들어왔습니다. 아마 아버지가 평생토록 마신 술을 10번이나 더 시킬 수 있을 정도로요.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그려왔던 제 꿈은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어요. 실용적이고 편안한 옷에서 벗어난 고급스러움, 제 이름 자체를 브랜드화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아마 저라면 가능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죠. 추운 겨울날 음식점 앞에 앉아 구걸을 하던 그 어린 시절부터 쭉 이어져 온 그 확신 말이에요."
그 당시 그녀에게는 정신적 지주이자 남자친구 펠과 교제하고 있었다. 사업의 확장만큼이나 야심가인 펠과의 관계도 그녀의 인생에 있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코샤에게 후원을 해주고 여러 조언을 건네준 것 또한 그였다. 그녀는 아마 두 마리의 길들여진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브라우닝 벨기에 권총의 총알은 고조되어 가던 평화의 시대를 관통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절대 가게 문 닫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어" 펠이 군으로 떠나며 코샤에게 말했다.
"아마 펠의 야망은 제가 어린 시절부터 몇 년간 그려왔던 것과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더 컸을지도 몰라요. 저는 그대로 가게 문을 닫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조용히 지내려 했었거든요." 코샤가 추억에 잠긴 듯 눈을 감고 던에게 말했다.
코샤의 매장은 휴양지 두 곳에 있었고, 전쟁의 영향으로 유럽의 귀족이 코샤의 매장이 정착한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전쟁의 영향으로 여성이 사회생활의 입지가 점점 커져갔고 편안하고도 세련된 코샤의 옷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누군가에겐 슬픔으로 얼룩진 시대가 저에게는 커다란 기회였어요. 수많은 죽음과 더불어 제 이름은 유럽 전반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죠. 다시 새로운 목표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펠과 함께 제 이름이 붙은 패션 제국을 만들기로요. 하지만 저는 곧 그러한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펠이 죽었거든요. 전쟁의 총알도 비껴간 그의 목숨을 앗아간 건 미끄러운 빙판길이었어요." 코샤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청초한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던은 그녀에게 손수건을 전달해 주었다.
"고마워요." 여인이 흰 실크 손수건으로 눈가를 조금 두드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펠과 함께 제 모든 것을 잃었어요. 갑작스런 이별의 아픔에서 저를 구해준 건 펠과 함께 그렸던 미래였어요."
다시 도전을 시작한 그녀는 향수부터 가방까지 다양한 제품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팔기 시작했다. 점점 입소문을 타며 그녀와 펠이 그린 패션 제국이 거의 가까워질 무렵 두 번째 전쟁의 불씨가 그녀의 매장들을 덮쳤다.
"전쟁이 끝난 후 저는 나치의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았어요. 제 인생의 첫 세계전쟁이 저에게 기회였다면 두 번째 세계전쟁은 모든 걸 앗아가는 폭풍우라고 생각되네요. 지금 이 나이가 되었지만 제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점점 사람들의 머리에서 제 이름이 붙은 브랜드는 잊히고 있어요. 그럼에도 제 머릿속 그림은 완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은 이 나이의 저에게 아직 그럴 힘이 남아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포함해서 말이죠."
던은 코샤와 자신의 사이에 놓인 게르니카를 바라보았다. 말, 여성, 부러진 검, 불타는 건물 그리고 빛. 그녀는 그림의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