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9)
작가의 말 : 여기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그토록 원해왔던 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죠. 자꾸만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습니다. 차오르는 눈물, 무거워지는 몸. 그렇습니다. 그녀는 다이어트 중 돌아가는 길에 치킨을 시켰습니다.
브런치 스토리에서 12회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500만 원의 상금과 출판 기회가 걸려있는 공모전이죠. 소설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작법에 대해서 공부를 한 적도, 여러 유명 작품을 습작해 본 적도 없죠. 인물을 구성하고 배경을 설정하는 방법도 모릅니다. 소설을 쓴 기간과, 글 쓰기에 대한 공부량이 제 열정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모를 일이죠. 나중에 제가 스타 작가가 되어 인터뷰를 하고 있을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아 현실적인 스펙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 이루어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지금,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제 꿈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 속의 던은 아마 저를 대변하는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네요.
We'll Meet Again - Jeremy Blake - Beautiful Piano Music (youtube.com)
이번 글은 이 노래와 같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반구형의 전시회로 향하며 그 남자를 떠올렸다. 팔짱을 끼고 지긋이 작품을 바라보는 기묘한 남자,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보다 먼저 도착해 물감들의 조화 속 무언인가를 찾고 있을 것이다. 투명한 유리문 앞에 온 던의 시야에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내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벽이 걸린 시멘트기둥의 위치가 변하거나, 해가 져 가는 시골의 밀밭을 연상시키는 옐로 오커 물감 색 조명의 캘빈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람 한 명만이 더 서 있었을 뿐이다. 남자와 사무적인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블론드 단발머리의 여자. 어림잡아도 자신과의 나이 차이는 4살 전후 일 것이다. 단조로운 패턴의 새하얀 맥시 드레스의 여자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반투과의 내부가 어딘가 밝아진 느낌이다. 유리문이 열리며 흘러들어 가는 여름의 공기를 느꼈는지 여자가 던쪽을 바라보았다. 발목까지 내려온 드레스의 밑단이 흔들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던의 노아를 떠올렸다. 공백의 기억으로 던을 구성하는 그 시절의 여자친구, 막연한 어둠만이 채운 공간 속에서 그녀가 부드럽게 속삭인다. '우린 또 만나게 될 거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자의 얼굴에서 이렇다 할 표정은 보이지 않았고,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다시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려 대화를 이어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정지하기 직전 찰나의 순간이 만들어내는 짧은 무중력처럼 던은 잠시 몸이 붕 뜨는 느낌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35mm의 필름 카메라에 모든 작품을 담기 시작했다.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카메라의 초점이 흔들린다. 아직 젊기에 노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쪽의 이야기가 신경 쓰여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쏠리는 모양이다.
"선생님, 이제 그만 돌아와 주세요. 언제까지 이렇게 떠도실 생각입니까.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우연히,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요." 블론드 단발의 여자가 같은 공간에 들어서 있는 또 다른 남자, 던을 의식했는지 잠시 던 쪽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회사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빈자리를 두고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모든 것을 그에게 빼앗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회사에 대한 선생님의 애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남자 손에 넘어가게 둘 수는 없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낮게 흘러가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던은 여자의 목소리에서 진심과 애정이 느꼈다. 자신 나이 또래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갓 피어난 땅 위의 튤립처럼 아름다운 여자와 30대 후반의 허공을 전전하는 듯한 남자, 다른 높이의 세계에서 만날 리 없는 둘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던은 귀를 열어둔 채 다음 기둥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세상에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다시 단발의 노아가 떠오른다. 흐르는 강물이 펼쳐진 부채를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던 전당포의 할아버지, 우리 또한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이런 일까지 떠오르다니, 하고 던은 카메라라의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댔다. 에밀 조르다의 <도둑맞은 금반지>. 소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작품이다. 시선을 내려 미술가의 확인한다. 화가의 이름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지 않나. 아마 나 없이도 충분할 거야. 내 모든 권한은 너에게 맡기지, 너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시회에 잔잔히 흐르는 피아노의 멜로디와 꽤나 어울리는 소리다. <We will meet again>. 남자는 말을 잠시 멈추고 전시회의 천장을 간지럽히는 소리를 귀에 담으려는 듯 천천히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름은 바꾸었으면 좋겠네, 지금 이 순간부터. 레인, 베를레인이 좋겠어" 남자의 눈가가 촉촉해 보이는 것은 조명 탓인가,라는 생각이 던의 머릿속에 들었다.
남자는 다시 평소와 같이 팔짱을 끼고 작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광택의 구두가 오늘따라 초라해 보인다. 여자는 잠시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또 오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긴 채조용히 전시회를 나갔고 마침 던도 전시회의 모든 작품을 매끄러운 표면의 필름카메라에 담았다. 구두의 반사되는 빛이 자신의 카메라를 비추기라도 하는 것일까.
빗소리가 굵어졌다. 예술의 거리를 밝게 물들이는 샛노란 빛이 차오를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입구의 유리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어딘가 쓸쓸하고 또 우울해 보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며 남자 주변을 둘러싼 분필로 그려진 선이 오늘은 다 지워진 느낌이다.
"젊은이, 오늘은 내가 바라보는 작품을 찍을 마음이 들었나?" 남자가 던에게 말하며 천천히 볼 주변의 근육을 올렸다.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던은 멈칫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그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35mm의 카메라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고, 천천히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댔다. 왜인지 모를 손의 떨림이 느껴졌다. 기둥에 걸린 액자 안에 걸린 그림은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자네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나?" 카메라의 셔터가 눌림과 동시에 옆의 남자가 말했다. 부드럽다. 지금까지 단단하고 조금은 냉소적으로 느껴졌던 그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다.
"어떻게 아셨죠?" 던은 지금까지의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듯 곧바로 말을 붙였다.
"카메라를 찍는 자네의 손을 보면 알지. 자네 손에 묻어 있는 아크릴 물감은 자네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해주지. 아직 그림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화가라는 것도, 얼마나 그림에 애정을 담고 있는지까지 말이야." 남자의 말에 던의 자신의 손을 보았다. 투박하고 상처 많은 손에 묻은 보라색 물감이 노란 천장의 조명을 받아 더욱 선명히 보인다.
"내 꿈도 화가였어. 아주 어릴 적부터 말이지. 자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아마 1년이 채 되지 않은 모양인데 맞나?" 던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 이름은 베를, 복제 예술품과 사람을 이어주는 평범한 중개인일세" 던은 남자를 보며 줄곧 선생님이라 불렀었던 전당포 할아버지, 피에르를 떠올렸다. 누군가를 항상 그리워하던 선생님, 할아버지의 이름은 피에르였다. 공백 속의 새로운 기억이 하나 튀어 오른 느낌이다. 던은 속으로 이름을 여러 번 되뇌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픈 눈을 하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제 이름은 던, 언젠가 세상을 놀라게 할 예술가이자 평범한 몽상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