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10)
작가의 말 : 우리는 지금 끝없이 오르내리는 선들의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요? 내리막길처럼 보이는 현재의 순간도 멀리서 보면 천천히 올라가는 선의 한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던은 전시회장을 나와 세븐편의점으로 향했다. 굵은 비가 내리고 있다. 아까의 피아노 선율이 귀에서 맴돌았고 잠든 거리를 깨우기라도 하려는 듯 일정한 간격으로 거리와 부딪히는 물방울들이 적절한 배경음을 만들어 주었다. 던이 신은 쪼리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어왔지만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시원함을 느꼈다. 던은 방금 전의 대화를 다시 생각해 냈다. 언젠가는 세상을 놀라게 할 화가, 그런 대사를 당당히도 내뱉은 것이다. 던은 뒷짐을 지고 매끄러운 빙판길을 달려 나가는 스케이팅 선수를 흉내 내며 앞으로 미끄러지 듯 나아갔다. 최근에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다. 맨해튼의 상점가 소호를 연상시키는 상점가를 배경으로 그는 빠르게 스케이팅을 했다. 얇은 수막을 형성하며 길 위를 흐르는 빗물이 검은 비닐을 띄웠고 비닐은 던의 쪼리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던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바로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두 손을 등 뒤로 땅에 댄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차오르는 듯하다. 입을 벌리며 눈을 감는다. 빗방울이 하나 둘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피아노 멜로디에 맞추어 던의 온몸으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뚝 끊겨버렸고 던은 곧바로 눈을 떴다. 붉은빛으로 시야가 반쯤 가려졌다. 던은 고개를 좀 더 뒤로 젖혔다. 던의 눈에 한쪽 손에 빨간 우산을 들고 다른 한쪽 손을 내밀고 있는 단발 블론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던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고 소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폴리 베르제르의 바. 필름 속에 갇혀 방의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작품 중 하나다. 그림 속의 금발 바텐더가 현실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젊은 날 추억 속 보르도의 와인바와 무너져 내릴 듯한 희미한 멘션이 떠올랐다. 어디서 온 기억인지 곰곰이 떠올려 봤지만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공백 처리가 된 바코드 속 기억의 어딘가, 그때 소녀가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소피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괜찮아요." 던은 바로 대답을 하고 다음 말을 골랐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며 소녀의 맥시 드레스에 시선을 던졌다. "제 이름은 던이에요. 나이는 스무 살이고요." 던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 탓에 얼굴을 반쯤 찡그리며 말했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하며 일그러진 던의 표정 때문인지 뜬금없는 자기소개 때문인지, 소녀는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 이름은 소피예요. 나이는 스물셋이고요." 던과 소피는 줄지어 비를 담고 있는 상점들을 배경으로 하나의 우산 아래 마주 보고 서 있다.
이쁜 이름이네, 하고 던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자신의 쪼리로 떨궜다. 아까 밟은 비닐봉지가 자신의 발가락 사이에 껴 있었다. 노아와 자신의 나이 차이도 딱 이 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보육원의 17살 소년을 사랑하던 소녀의 나이는 14살이었다. 여기까지 떠올리자 던은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은 노아의 나이가 지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속의 공백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 그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까 전시회장에서 봤죠?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으셨잖아요." 소피가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던은 카메라를 들어 올려 보이며 눈을 찡긋했다. "여기 근처에 사시는 거예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던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왔어요. 아까 전시회장에서 저와 이야기하던 그 남자 말이에요. 비가 와서 잠시 구경도 할 겸 카페를 찾고 있는데 주변에 연 곳이 없네요."
"지금 시간대가 조금 일러요. 여기 거리의 모든 가게는 점심이 지나고 나서야 문을 열거든요." 그러다 던은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고 짧은 음성을 내뱉었다. "비가 오는 날에만 열리는 술집이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이 시간에도 열려 있을 거예요."
"진짜요? 알려주세요." 소피는 신기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세븐편의점이 보일 거예요. 거기서 오른편으로 돌아 5분 정도 걸어가면 아마 녹색 천막이 보일 거예요. 바로 거기예요."
소피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빗소리가 둘 사이의 거리를 채운다. 정적을 깨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혹시 같이 가지 않을래요? 왠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라서요." 그녀가 말을 마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던도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고 눈이 마주친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던이 이 술집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늦은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다 문득 답답한 마음에 캔버스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달이 환하게 떠 비추는 새벽의 거리는 낮과는 딴 판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무명밴드의 공연 소리, 술집의 젊은이들이 술에 취해 꿈꾸듯 얘기하는 미래의 자화상, 화려하게 줄 지은 조명들의 빛을 받으며 키스하는 커플의 달콤한 소리, 이 모든 소리가 어우러져 하룻밤 꿈과 같은 젊은 정경을 그려낸다. 벤치에 앉아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그 또한 한낱 몽상의 일부가 된 듯하였고 그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갑작스레 여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게 안에 앉아 이런저런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거리의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암묵적인 규칙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모두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 모두 하나가 된다. 입을 모아 비를 맨몸으로 맞으며 부르는 노래는 쥬디의 <Over the Rainbow>. 오즈의 마법사의 OST로 유명한 곡이다.
던도 분위기에 휩쓸려 벅차오름을 느꼈지만 캔버스를 들고 왔기에 비를 피하러 어딘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달리다 도착한 곳이 지금 소피와 들어온 초록 천막의 술집이다. 그는 살짝 젖은 캔버스를 들고 들어갔다. 여전히 사람들은 거리에 모여 삼삼오오 부둥켜 앉으며 노래를 부른다.
<어딘가 무지개 너머 높은 곳에 꿈꾸던 나라가 있어요
하늘이 파랗고 꿈들이 이루어지는 곳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무지개 너머 어딘가 파란 새들이 날아가고 꿈이 정말로 이루어져요>
그들은 노래의 주인공이자 오즈의 도로시 쥬디가 47세의 젊은 나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어디까지나 거리를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