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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Aug 27. 2024

레이니데이 속 밤을 세는 사람들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11)

작가의 말 : 자칫하면 흑백논리에 빠질 수 있는 일반화에 나쁜 점만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머릿속에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아 때로는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해 주죠. 대부분 캔커피는 맛있다고 일반화된 공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처음 새로운 캔커피를 도전해 봤는데 아쉽네요. 예외규정이 필요한 듯합니다.



천막 술집에 들어온 소피와 던은 스테인리스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3~4개 정도의 테이블에 초록유리의 병으로 빼곡히 들어찬 음료 진열대가 그다지 넓지 않은 8평 남짓의 공간에 알차게 배치되어 있다. 던은 이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그리 밝지 않은 져물어가는 노을빛 조명과 내부가 살짝 비치는 주방 안에서 티브이를 보며 담배를 피우는 가게주인.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일용직 사람들이 고된 노동을 하고 찾을 법한 정감이 가는 가게다. 메뉴는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만두, 볶음밥, 닭강정, 등등 한 가지 빼놓고 말한 점이 있다면 모두 앞에 냉동이 붙는다는 점이다. 주방에는 이렇다 할 조리기구가 없는 듯했다. 그렇지만 전자레인지 하나로 어떤 가게보다 빠르고 따뜻한 안주가 나오기에 가게에 불만사항은 전혀 없다.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비가 오는 날만 문을 연다는 점일까.


"조금 허름하죠?" 던이 원형 테이블에 앉아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리는 소피를 향해 말했다.


"아뇨. 나름 괜찮은 거 같아요. 이런 분위기의 술집은 오랜만이에요. 원래 이런 가게에서 나오는 안주가 진짜 맛있는 거 알죠?" 소피는 던을 다시 바라보며 대답을 한 후 기대된다,라는 말을 조그맣게 덧붙였다.


"메뉴판은 따로 없어요. 사실 안주랄 것도 없고요. 뭔가 죄송하네요." 하고 던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떤 메뉴가 있는지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편의점 냉동식품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요." 주방의 티브이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름이 던이라고 했죠?"


"맞아요. 그, 그쪽은 소피.." 던이 수줍은 듯 말끝을 흐렸다.


"서로 말 편하게 할까요? 이것도 인연이잖아요." 소피가 대답을 하고 아직 마르지 않은 던의 머리카락을 귀엽다는 듯 쳐다봤다.


던은 손으로 무릎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야. 평소에 네가 시키는 대로 주문해 줘. 당연히 술은 소주겠지?" 소피가 던의 뒤에 있는 음료진열대 안의 초록병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냉동 크림 파스타와 닭강정은 시킨 지 5분도 되지 않아 나왔다. 양쪽 끝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금세 풀리는 실타래처럼 가게주인은 던이 무엇을 시킬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곧장 음식을 내어왔다. 비록 인스턴트지만 진한 버터크림소스 향과 매콤한 닭강정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소피는 젓가락으로 크림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앞에 미리 채워진 잔을 들어 던쪽으로 향했다. 한 병이 채 비워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던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피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주 한 병을 꺼내왔다.


"술 잘 마시네." 던이 소피의 잔에 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아직 반 병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듯하다.


소피는 대답을 대신하기라도 하려는 듯 유리잔이 채워지자 곧바로 들이켰다. 소피도 어느 정도 취한 모양이다. 던은 문득 전시회의 남자가 떠올라 조심스레 질문했다. "아까 그 경매사분과는 무슨 사이야?"


"어떻게 알았어?' 소피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던은 자신이 매일 그림을 그리기 전 전시회에 가 35mm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과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남자가 어김없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건넨 의문의 말과 소피가 나간 후 나눈 대화를 빠짐없이 말했다. 그리고는 잔을 단숨에 들이키며 아까 남자와 대화를 하며 문장의 의미를 왜 물어볼 생각을 안 했을까, 하고 조금 후회했다. "너의 그림은 무엇인가 놓치고 있어"


"베를은 우리 회사 사장님이야. 복제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경매회사고. 아 내 직업을 아직 말 안 했네. 나는 경매사야. 넌 화가 지망생이지?" 소피가 말을 마치고 닭강정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어떻게 알았어?" 던이 놀라 입에 가져다 대던 잔을 멈춘 채 말했다.


소피는 큿, 하고 작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던의 손을 가리켰다. 잔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니 빨간빛이 물든 보라색 물감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던은 머쓱해하며 얼른 잔을 비우고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나이는 3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녀는 이미 어엿한 직업을 가진 사회인이다. 별다른 작품이나 뚜렷한 재능 없이 그림에만 매진하는 자신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의 직업 특성상 수많은 작품을 봐왔을 것이다. 자신의 방 안 이젤 위 캔버스에 담긴 터질듯한 파이프담배를 떠올렸다. 그림에서 꺼내와 색을 입히고 한 모금 빨아들이고 싶은 기분이다. 평소에는 작다고 느껴져던 스테인리스 테이블이 오늘따라 넓게 느껴졌는데, 물결 없는 호수를 담은듯한 원형표면에 비친 던의 잔과 소피의 잔이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인가.


던은 베를에 대해 물어보았고 소피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새 굵은 비가 천막을 때리는 소리는 잦아들었고 고개를 내민 해의 꼬리가 초록 천막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피는 오너와 비서 사이로 시작된 부부 사이의 외동딸이었다. 아버지는 규모가 작지 않은 사업체를 여러 개 운영하고 있었는데 소피가 끌린 건 그 뒤에서 일정을 짜고 조언을 해주며 실질적으로 조직을 관리하는 엄마의 역할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출근하며 입는 어머니의 흰 블라오스와 검은 블레이저가 어린 소피의 눈에 몹시 이뻐 보였다.


"평생의 소망은 어찌 보면 이쁜 옷처럼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되는지도 몰라. 지금도 두 분은 순조롭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거야. 내 학창 시절에 그렇다 할 불행은 없었지만 조금 외로웠던 것 같아. 선생님을 포함한 반의 모두가 친절하게 대해주었어. 하지만 더 다가오지는 않았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집에 돈도 많고 얼굴도 이쁘니 아이들 입장에선 조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야.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점도 이 사실을 깨달을 즈음이었어. 아까 출근하는 엄마의 옷이 마음에 들어 비서를 꿈꿨다고 했잖아?" 소피가 잠시 말을 멈추고 던을 바라보았다.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던 던은 흐름을 깨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다문 채 재빠르게 고개만 끄덕였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새우는 사람, 내가 미술품에 빠져든 계기는 이 작품이야.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커다란 유리창의 식당, 텅 빈 밤거리. 희망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그림이지만 나는 꽤 위로를 받았어. 외롭다고 느껴지면 그림을 몇 시간이고 계속했어 봤거든.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부터 아버지의 사업이 점점 커지고 해외로 엄마와 출장을 가는 일이 잦아졌어. 집에 돌아오면 항상 혼자였던 거야. 처음에는 호퍼의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는데서 그쳤지만 점점 그림에 관심이 생기게 됐어. 그렇게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전시회를 찾았지. 매일, 24시간 열려있는 전시회장은 아마 거기가 유일할걸?"


던은 소피가 말하는 전시회장이 자신이 매일 필름카메라를 목에 걸고 찾아가는 전시회장을 말하는 것임을 뒤늦게 눈치챘다. 그렇다면 거리의 카페 중 점심 전부터 오픈하는 가게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리라. 일부로 모르는 척을 한 건가? 이유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라고 던은 어딘가 흐뭇하고 설레는 생각을 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잔을 든 소피와 서로의 유리를 부딪히고 홀짝였다. 주방에서 가게주인이 무서운 영화라도 보고 있는 것일까, 티브이에서 여자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던의 볼을 형체 없는 누군가가 어루만지며 속삭인다. "자연스레, 도망칠 수 없어."


"베를, 아니 사장님을 처음 만난 장소도 저 전시회장이야. 그리고 전시회장의 큐레이터이자 갤러리 오너도 베를이고. 그리고 나는 졸업과 동시에 그의 비서로 취직하게 되었어."


어떠한 간판도 찾아볼 수 없는 전시회장. 24시간 젊음의 거리의 일부를 구성하는 반구형의 전시회장의 오너가 그 남자였다니, 매일같이 기둥에 걸린 작품을 바꾸고,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서 작품을 지긋이 바라보던, 자신을 평범한 중개인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가 바로 전시회장의 오너였던 것이다. 이질적인 광택의 구두와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회색조끼 차림의 그를 다시 떠올리며 소피가 말한 그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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