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13)
작가의 말 : 이제부터 2부가 시작됩니다. 뿌려놓은 퍼즐 조각이 본격적으로 맞춰지기 시작되는 챕터입니다. 내일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아마 술도 마시게 되겠죠. 그래서 미리 글을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벌써 졸린데 큰일 났네요. 하하. 하지만 저는 인간의 의지력이 생각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맘먹으면 못할 게 어딨겠습니까?
다시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감미로운 빗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해?" 소피가 말했다.
"소방관 생각" 던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 던은 순간 자신이 무슨 단어를 뱉었는지 다시 떠올렸다. 뜬금없이 소방관이라니, 취한 건가,라고 생각하며 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방관?"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냥 잠시 헛소리가 나왔을 뿐이야. 그나저나 사장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던은 아까 전시회장에서 엿들은 대화가 떠올라 소피에게 스트레이트로 질문했다.
"말하자면 긴데, 암튼 그래. 일이라기보다는 사고에 가까워."
'사고?" 던이 말하며 잠시 천막술집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빗소리가 더욱 거세진 느낌이다.
"그래 사고. 베를이 아끼던 젊은 화가가 죽었거든. 아무래도 충격이 큰 가봐."
던은 스테인리스 테이블을 배회하던 시선을 소피로 향했다. "화가가 죽었다고?" 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소피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죽었어. 그것도 스스로 번개탄을 피워서. 안타깝다고는 생각해.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소피가 말하며 조그맣게 덧붙였다. "베를은 책임이 없어."
소피는 말을 마치고 취한 듯 테이블 위에 턱을 괴었다. 던은 그런 소피를 보며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화가의 죽음을 말하는 소피의 눈에서 일말의 슬픔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인가. 혹은 이유 없이 계속 마음 한 구석에서 맴도는 듯한 이름 모를 소방관 때문인가. 소방관이라 하니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이 떠올랐다. 이지러진 넓은 해변과 파라솔, 잘게 부서진 치즈가 올라간 조개, 그리고 집어삼킬 듯한 불길. 자신을 구해준 소방관은 부모님과 함께 재가 되었다. 짙은 소방복 속 그의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꽤 젊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지금 자신의 나이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던은 술병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한쪽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다른 한쪽을 마저 감고 속으로 수초를 센 후 다시 눈을 떴다. 술병은 그 자리 그대로 존재했다. 당연히 눈을 감았다 떴다는 이유만으로 술병이 사라질 일이 없다. 하지만 왜인지 부모님을 잃은 그날의 기억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절대 잊을 리 없는 기억임에도 타인의 기억을 빌려온 듯 그 시간대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감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시간대에서 동시에 그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 편이 아마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왜 죽.. 아니 왜 돌아가신 거야?"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전시회장에서 베를한테 말이야. 그리고 베를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대로 나한테 말해줘."
"알겠어."
"약속이다?" 소피가 미소를 지으며 새끼손가락을 던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약속이야."
던이 담배 캔버스의 방에 돌아왔을 때 이미 하늘에는 부메랑 달이 걸려 있었다. 세븐편의점에서 사 온 캔커피의 구멍철에 손톱을 걸고 살짝 힘을 주었다. 겹겹이 쌓인 지질층과 같은 손톱이 살짝 갈라지는 미묘한 통증을 느껴졌지만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이것은 던에게 있어 일종의 루틴이다. 책상 위에 캔커피를 올리고 물감을 짠다. 그리고 브러시를 든 손이 살짝 떨리기 시작하면 그때 한 모금을 마신다. 그렇게 아무것도 담지 않은 빈캔이 되고 나면 동시에 붓을 내려놓는다. 서너 시간은 걸리는 작업이다.
던은 지루하며 동시에 섬세한 붓질을 마치고 팔레트와 함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앞으로 이틀이면 되겠네,라고 생각하며 숙련된 자동차 정비사가 소모품을 갈아 끼우듯 빈캔을 바닥의 쓰레기빈에 던졌다. 기존의 캔들과 부딪히며 찰랑거리는 경쾌한 알루미늄 소리가 났다. 던은 침대에 눕기 전 베를을 떠올리며 팔짱을 끼고 작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름 중심점을 기준으로 배치와 구도가 잘 맞는 듯하다. 터질 듯한 파이프와 어울리는 거칠 질감의 색표현까지. 던은 만족스러운 듯 불을 끄고 좁은 침대에 누웠다. 깊은 어둠이 방에 깔리고 던의 머리는 천천히 베개의 솜을 압축시키며 내려갔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있는 듯한 감각. 의식이 있으면서도 통제가 안 되는 느낌이다. 넓은 밭에 홀로 바다를 보며 앉아 그림을 그린다. 바닷물이 싫증이 났는지 던의 바로 앞에서 청어가 힘차게 뛰어오른다. 추진력이 부족했는지 나사 하나 없는 장난감 로켓처럼 그대로 꼬리부터 떨어진다. 물방울이 던의 얼굴에 튄다. 마침 옆에 높인 천으로 얼굴을 닦지만 그제야 천이 자신이 베고 있는 배게임을 눈치챈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뉘어 다시 잠을 청한다.
다시 던은 고독한 폐어선이 띄워져 있는 포구 앞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과연 자신은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일까. 달리, 반 고흐, 피카소 그들처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끝내 어린 날의 치기 어린 꿈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그림을 좋아하기는 한가? 좋아한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눈앞에 있던 붓만을 보고 현실에서 도망친 겁쟁이일 뿐인가.
누군가 속옷만 입은 채로 자신의 옆에 앉는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왔는지 머리카락에 물기감이 남아 있다. 그가 머리를 털자 물방울이 몸에 닿고 기분 좋을 만큼의 청량함을 느낀다. 입 속으로도 한 방울이 들어왔다. 소금의 짠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닷물은 아니다. 이내 태양이 갑작스레 지고 어둠이 찾아온다. 그와 자신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끊임없이 빛을 찾으면서, 어둠 속에서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뿐이겠지. 우리는 공백 속 기억을 직시해야만 해. 그때가 되면 담아낼 수 있을 거야. 너는 그림에, 나는 그 아이에게. 이제 가봐야겠군."
"난 그림에 재능이 없어." 배게의 이지러진 감촉을 뺨으로 느끼며 말한다.
"재능이란 수천수만 번 갈고닦은 검을 시연하는 것에 불과해. 단지 대나무 하나만 베어내면 되잖아? 더 중요한 건 수천수만 번 갈고닦은 시간과 그 시간에 담아낸 너의 땀방울이야." 노인이 말한다. 던도 아는 목소리다. 어둠 속에서 가벼운 부채가 만들어내는 바람이 뺨에 느껴진다. 피에르. 확실히 저 노인의 이름은 피에르다.
"선생님?"
"인생이란 무수한 가능성의 안개 깔린 길을 걸어가는 거야. 무언가에서 도망쳐 온 곳에서 만난 보잘것없는 소녀가 평생의 연인이 될 수 도 있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될 거야. 과연 이 소녀가 내 운명의 여인인가, 단지 회피하며 마지못해 고른 차선책이 아닌가. 그리고는 눈을 감는 순간에야 떠올리게 되는 거야. 아, 나는 그 가여운 소녀를 미친 듯이 사랑했구나, 하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