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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Aug 31.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14)

작가의 말 : 이제 곧 개강이네요. 필력도 점점 좋아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침대에서 눈을 뜬 던은 간밤의 꿈을 떠올렸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뒤척이며 살며시 눈을 뜰 때마다 아 꿈이어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어렴풋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 꿈속의 배경조차 지워져 버렸다. 던은 매일 그래왔던 것처럼, 필름카메라를 목에 걸고 전시장으로 향했다. 


반구형의 전시회장에 도착하니 역시나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던이 들어가며 말을 걸었다. 


"작품이 다 완성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베를이 시선을 그대로 기둥의 액자에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아마 거리에 전시해 놓지 않을까요?" 던이 말하며 이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작품이 완성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을까, 하고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손에는 어떠한 물감도 묻어 있지 않다. 


"지금 내가 보는 작품의 제목이 뭔지 알고 있나?" 베를은 살짝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던은 베를의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끌렸는지 어두운 노란 조명을 받으며 남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전시회 내부를 물들인 노르스름한 조명을 머금은 시멘트기둥은 벌꿀이 발린 듯했고 던은 촘촘한 육각향의 달콤한 향을 느끼며 기둥의 작품을 바라보았다.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이네요." 추수가 끝난 황금빛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들을 차례로 눈을 담으며 말했다. 


"오늘 전시회장에 걸린 여러 작품 중 유일한 진품이라네. 느껴지는 게 있나?" 


"삼분할 구도와, 수평선을 통한 중심점 부각,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리듬감. 확실히 복제품에 비해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네요. 아무리 정교한 무명 화가가 잘 카피한다 해도 원본을 따라잡기는 힘든 법이죠." 던은 말을 마치고  그림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를 분석적으로 바라보며 새삼 감탄했다. 이 작품을 완벽하게 복제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일 들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자네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사실 이 작품은 모조작 일세. 우리 회사의 카피 화가가 복제한 작품이지."


던은 베를의 말에 다시 작품을 바라보았다. "원본보다 색감이 조금 더 어두운 편인가요?" 남자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묘하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베를은 정답, 이라는 짧은 말을 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전시회장의 벌꿀기둥을 휘감는 재즈의 경쾌한 리듬을 느끼며 던은 생각에 잠겼다. 진품과 가품, 지금이야 화가가 직접 카피를 하지만 나중에 기술이 발달된다면, 자신의 목에 걸린 35mm의 필름카메라처럼 원본을 완벽하게 복제를 할 수 있는 화가가 나타난다면 그때는 어떻게 구분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진품과 가품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면 원본의 의미는 영영 상실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전시회의 조명을 올려다보았다. 


"최근 들어 드는 생각이 있다네. 과연 미술, 아니 미술을 넘어선 예술을 즐기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눈을 하고 있을까, 원본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 시점, 배치, 그리고 재료와 질감까지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되어 진품보다 더욱 진품 같은 모조작이 세상에 쏟아지게 된다면 진품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나, 이런 생각 말일세."


던은 남자의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수많은 작품을 분석의 재료로써 눈에 담아둔 던 자신도 고흐의 정밀화라면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 있다. 던은 머릿속에서 고흐의 선을 흉내 내며 가상의 붓질을 시작했다. 구도를 나누고 테라스의 윤곽을 연하게, 그럼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두께로 스케치한다. 팔레트에 물감을 짜고 색을 입히려는 순간. 베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작품의 가치는 누가 결정한다고 생각하나." 


"구매자라고 생각합니다." 던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순간, 은은하게 흐르던 재즈의 선율이 뚝하고 끊겨버렸다. 또다. 기억이 뒤죽박죽 엉키고 침범하는 듯한 감각. 거리감각과 시간감각이 없이 오로지 자신만이 무중력의 어둠 속을 가라앉는 느낌. 눈앞의 남자가 말한다. 올백머리의 어딘가 차가운 인상의 남자. "작품의 가치는 구매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남자의 이름은. 


"이상적인 이야기야. 작품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네. 만일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작품은 어떠한 것도 담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된다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준점 혹은 선을 정하지. 물론 기준이라는 것은 조금 더 입체적일 수도 있고 말일세. 우리는 그 기준을 통해 닮은 점을 중심으로 새로 접하게 되는 작품을 판단하는 거야. 그 기준을 정하는 자가, 기준의 영향을 받는 모든 이에게 의미를 강요하는 것이지. 모두가 참여하는 줄다리기일세."


베를이 말한다. 동시에 기본 적 없는 섬 어딘가에 떠도는 자신이 말한다.  베를이 조그맣게 덧붙인다. "내가 그 기준을 정하는 자가 돼야만 해."


"전에 저에게 했던 말 기억나세요?  그때 분명 제 작품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하셨습니다."


베를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때로는 진품을 넘어서는 가치가 가품에 담겨있을 수 있다네." 기억 속 누군가가 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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