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16)
작가의 말 : 어느덧 16화까지 왔네요. 웹소설이 아니면 일반소설로 돈 벌기 힘들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수요가 점점 적어지기 때문이겠죠. 브런치를 시작하고 글을 열심히 쓰면 구독자가 쭉쭉 늘거라 생각했지만 이 또한 제 단순한 낙관일 뿐이었겠죠. 그래도 끝까지 완결까지 달려보겠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만 열리는 무간판 술집, 소피와 던은 익숙한 듯 자리를 잡고 냉동 파스타와 술을 주문했다.
"생각보다 잘 짜인 그림이네." 소피가 던의 그림을 보자마자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그래?"
"팔 생각 있어?" 소피가 스테인리스 원형 테이블에 기대어 세워진 캔버스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림이 적잖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소피는 던이 단순히 손에 물감을 묻히고 다니는 지망생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완성작을 보니 경매에 나오는 작품들에 견주어도 부족할 것이 없는 듯했다.
"그렇긴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 작품 완성에만 몰두했었거든. 파는 구체적인 방법이나 과정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던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진한 크림향의 파스타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비가 오는 날 술집을 찾으면 항상 그랬듯이. 평상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적당히 부풀어 오른 빵조각들이 같이 나왔다는 점일까나, 하고 던은 빵조각을 손으로 집어 크림 파스타에 살짝 담갔다.
소피는 흠, 하고 다리를 꼬았다. "속해 있는 길드가 따로 있어?" 소피가 말을 마치고 던을 따라 빵조각을 크림에 찍어 한 입에 넣었다. 진지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입꼬리는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길드?"
"그래, 길드. 보아하니 속해 있지 않은 모양이네. 우선은 길드에 들어가는 게 좋아. 어느 갤러리에서 무명 화가의 작품을 사들이겠어. 평생 돌아다녀도 사주는 곳은 찾지 못할 거야. 살롱에 출품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우선은 유명 길드에 들어가. 마스터 밑에서 작업을 도와주다 보면 기회가 생길 거야. 개인 전시회를 열거나 살롱에 출품할 때 자기 밑의 수습 화가들의 작품을 하나 둘 끼워 전시하는 게 관례거든. 거기서 눈에 띄어야 해." 소피가 잠시 말을 멈추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던의 얼빠진 표정을 보고 큿,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길에다가 전시해 놓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도 사주지 않으려나?"
"내가 장담할게, 절대 안 팔려."
던은 소피에 말에 알 수 없는 경쟁심이 끓어올랐고 곧바로 잔을 들이켰다.
"그나저나 작품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어. 붓 잡은 지 10년 차가 되는 베테랑의 작품이라 해도 믿을 정도야." 소피가 세믹접시에 파스타를 옮기며 말을 이었다.
"길드에 들어가면 내 작품이 아니라 남의 작품을 그려야 하는 거 아니야?" 던이 눈썹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맞아. 어쩔 수 없는 현실이야. 네가 취미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이상 거쳐야만 하는 단계지." 소피는 꼬리 내린 들개 같은 던의 표정을 보며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뭐, 너의 선택이지, 우선은 즐기자고. 너의 작품이 훌륭하다는 것만은 내가 보장할게."
소피와 던이 술집을 나왔을 때는 거리를 채우던 오즈의 노래와 함께 어느새 비가 그쳐있었다. 소피는 또 봐, 하고 손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소피의 뒷모습이 완전히 새까맣게 잠기자 던 또한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작품만 완성된다면 그 뒤는 알아서 잘 풀리리라 생각했던 던이었다. 정말 소피의 말대로 자신의 작품을 구매할 갤러리는 없는 것인가. 길드에 들어가 유명 화가의 밑에서 보조를 한다면 과연 그림 그리는 행위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을까. 집을 나설 때 가볍게만 느껴졌던 캔버스가 지금은 무겁게만 느껴졌다. 집에 돌아온 던은 캔버스를 구석의 흰 벽에 세워두고 새로운 캔버스를 이젤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지친 몸을 그대로 침대로 던졌다.
다음날, 어김없이 일찍 눈을 뜬 던은 카메라는 목에 걸지 않은 채 전시회로 향했다. 눈 깜짝할 새에 도착한 던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베를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일세. 여기 놓여있는 사진, 자네의 작품이지 않은가?" 베를이 말하며 사진을 흔들어 보였다.
"맞습니다." 던은 대답하며 자연스레 베를의 옆으로 다가갔다.
"내 생각대로야. 흠잡을 데가 없는 작품이더군. 아마도 자네는 화가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모양이야.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지." 베를이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던은 베를의 이 문장이 신경이 쓰였다. 완벽하지 않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던은 일말의 수수께끼 같은 힌트를 얻기 위해 어젯밤 소피와의 이야기를 베를에게 빠짐없이 전달했다.
"길드라. 소피다운 현실적인 조언이군. 어느 정도 맞는 말이야. 참, 자네가 나에게 했던 말 기억나나?" 베를이 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분명 자네는 나에게 세상을 놀라게 할 화가가 된다고 말했지."
"기억납니다."
"그렇다면 길드에 들어가는 것은 추천하지 않겠네. 그전에 아마 자네를 받아줄 길드는 없을 거야."
"제 작품이 아직 부족해서 그런 건가요?"
"아까도 말했지 않은가. 흠잡을 데가 없는 작품이라고. 그렇다기보단 자신보다 뛰어난 제자를 받아주려는 화가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만큼 자네의 재능은 몹시 뛰어나다는 말이네. 자네의 작품은 마치 빈틈없이 맞물린 조각배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구도와 배치, 색감까지.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을 거야. 자신의 위치에 대한 위협 또한 느낄 테지. 그렇게 묻힌 젊은 화가만 해도 수십 명이라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 않은가." 베를이 잠시 말을 멈추고 던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던은 무언가에 압도되는 듯한 묘한 느낌에 시선을 시멘트기둥의 액자로 황급히 옮겼다. 베를은 그런 던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제안하나 하지. 나랑 같이 일해보지 않겠나."
"무슨 일... 이죠?"
"베를레인,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일세. 나도 자네와 마찬가지로 액자의 테두리를 떠돌고 있는 중이었다네. 자네도 언젠간 알게 될 거야. 자네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 또한 정확히는 모른다네. 단지 자네가 무엇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느낄 뿐, 하나의 문장 혹은 단어, 아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
던은 베를의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아마 동질감일지도 모른다. 소피에게서 느낄 수 없던 공허한 향과 분위기.
"자세한 얘기는 장소를 옮겨서 하지." 베를은 기둥에서 몸을 돌려 유리문으로 걸어갔고 던은 그의 광택구두를 보며 따라 걸어갔다.
30분쯤 걸었을까, 거리의 낮은 상점과 들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중세시대의 귀족이 살법한 주택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언덕을 조금만 더 올라가니 감각적인 디자인의 건물 앞에 푸른 잔디가 깔려 있었고 베를은 그대로 가로질러 걸어갔다.
"내 회사라네." 베를이 짧게 말했다.
던이 입구를 들어서니 탁 트인 로비가 나왔다. 벽에는 다양한 작품이 걸려 있었고 갈색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검은 소파 2개와 가운데가 동그랗게 들어가 있는 테이블이 놓였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에는 소피가 앉아 있었다.
"사장님!" 소피가 놀란 듯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하던 일 마저 하게. 아 이 친구가 누군지는 이미 알지 않나" 베를이 손바닥을 던으로 향하며 소피에게 말했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거야. 새로운 카피 화가로서."
최근에 베를레인으로 이름을 바꾼 베를의 회사는 모조품 전문 경매 회사였다. 다른 경매 회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직접 카피 화가들을 관리해 자체적으로 생산한 작품을 취급한다는 점이다. 꽤 규모가 큰 모양인지 각 지역에 직접적으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었고 갤러리를 통해 팔리지 않은 작품들을 추려 경매에 보냈다.
"일주일에 한 작품, 아마 상당히 힘들 걸세, 하지만 자네라면 충분하리라 믿고 있지. 대신 원한다면 언제든지 몇 점이든 자네의 개인적인 작품도 보내주게나. 별도의 심사 없이 바로 갤러리에 걸리게 될 거야. 이 작품도 포함해서 말일세." 베를이 인화된 필름 사진을 꺼내며 말했다.
던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아마 길거리에 무작정 전시해 놓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리라.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왜 저인가요?" 던이 말했다.
"매일같이 전시회장에 나와 사진을 담아가는 자네의 열정에 이끌렸다고 생각하게." 베를의 목소리에 어딘가 슬픔이 묻어 있었다.
"사장님 이제 다시 회사로 돌아오시는 건가요?" 소피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런 셈이지. 나도 언제까지 과거에 묻혀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누구 덕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라네." 베를이 던을 슬며시 쳐다보며 말했다. 여전히 눈동자에는 깊은 슬픔이 어려있다. 던은 언젠가 들었던 죽은 젊은 화가를 떠올렸다. 베를이 아끼고 아꼈다던 번개탄과 함께 미술계를 떠난 젊은 화가. 그 또한 카피 화가였을까. 끝내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한 붓질을 멈춰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손바닥으로 입술을 쓸어내렸다.
"이 건물의 2층에 개인 작업실이 마련되어 있다네. 아마 필요한 도구들은 전부 준비되어 있을 거라네. 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소피에게 말하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이름을 안 물어봤군."
"던입니다." 던은 이런저런 생각은 접어두고 지금 당장은 눈앞의 기회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쩌면 베를레인을 발판으로 자신의 꿈을 결국에는 이루어낼지도 모른다. 막연한 기대와 설렘이 온몸을 간지럽혔다.
"제 이름은 던, 언제가 세상을 놀라게 할 화가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던이 갑작스레 소파에서 일어나 뜬 목소리로 말하자 베를과 소피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