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15)
작가의 말 : 인생도 진품과 가품으로 나눌 수 있을까요? 만약 나눌 수 있다면 어느 쪽에 더욱 높은 가치가 측정될까요?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저는 소설 쓰는 행위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 인생을 스쳐갔던 포커, 수학, 술.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결국엔 소설 또한 흘러가는 제 인생의 한 구성요소로 남고 마는 것일까요? 오늘의 글은 조금 지루할 수 있습니다.
던은 마침내 붓을 내려놓고 자신이 완성한 첫 작품을 바라보았다. 반 정도 남아있던 캔커피를 단숨에 들이키며 작품의 제목을 고민했다. 터질듯한 거친 질감의 몽환적인 파이프와 배경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두께의 자유분방한 선들, 꽤나 잘 맞추어진 퍼즐 같은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던은 평평한 벽에 인화되어 포스트 되어 있는 유명 작품들의 모작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작품이 저 사이에 끼어들어가 있어도 전혀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는 듯했다. 파이프담배가 벽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터지기 직전이다. 던의 머릿속에 제목이 깊숙이 떠올랐다. 균열의 순간. 작품의 제목은 균열의 순간이다.
하루와 하루 사이의 경계, 거리의 모든 세포가 떨리며 활기를 불어넣는 자정의 시간, 던은 목에 카메라를 건 채 자신의 작품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이 시간대에 반구형의 전시회장으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던은 소피를 떠올렸다. 블론드 단발머리의 그녀, 레이니데이의 그날 이후 아직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라고 생각됐다. 가끔씩 떠오르는, 필름이 중간중간 찢어진듯한 그날의 기억들, 자신은 그날 이후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온전히 다 드러냈던 마음의 과녁은 이미 뚫려버렸다. 단 하나의 화살이지만 정교하고도 당당히 한가운데 꽂혀 있다. 가감 없이 모든 표적을 다 드러냈던 탓인가, 하지만 화살이 다시 뽑힐 일은 없다. 이미 그녀는 어긋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이름은.
노아, 지금이라면 확실히 떠올릴 수 있다. 계단이 나지 않은 허공의 공간, 그 공간보다 더 위에서 떠돌았던 그 기억들이 조금씩 완벽하지 못한 상태로 돌아오고 있다. 겁이 났다. 모든 것을 다시 직시하게 된다면, 과연 이 세계에서 온전히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던은 이런 생각을 애써 떨쳐내기 위해 머릿속을 다른 이름들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소피, 베를, 그리고 이름 모를 카피 화가.
거리는 낮보다 더욱 화려한 색채를 머금고 있었다. 줄지은 상점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 화음과 조화를 무시한 채 선명한 자신만의 색을 내뿜고 있다. 길에는 수많은 벽돌들이 포장되어 있는데, 일부분을 잘라내어 새운다면 웨스틱한 분위기의 건물의 한 벽면이 될 것이다. 이 길을 걷고 있으니 평생의 여인을 찾아 방랑하는 중세시대의 한 여행가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뜻 보면 주변을 무시하는 듯한 강렬한 색채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젊은 사람들과 함께 보니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던은 전시회장에 자신의 작품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을 생각이다. 그리고는 그 사진을 베를이 항상 서 있는 기둥 앞에 살며시 놓고 나올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본 그는 어떤 생각을 할지 몹시나 궁금했다. 수천번의 가상의 붓질과, 수십 개의 캔커피가 담긴 파이프담배. 혹시 모를 일이다. 그의 마음을 파고든 자신의 작품이 전시회에 걸릴지.
갑작스럽고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들어 별들이 박힌 하늘을 바라보았다.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던은 달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자꾸 웃음이 났다. 빠르게 지나쳐가는 거리의 흩어진 빛들이 선처럼 꼬리를 늘리기 시작했다. 비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 Over the Rainbow>. 하나 둘 입이 모여 커지는 노래가사가 던의 등을 힘차게 밀어주었다. 던은 도착했고, 잠시 등을 굽혀 무릎에 손을 댄 채 숨을 골랐다.
하늘이 파랗고 꿈들이 이루어지는 곳, 던은 노래가사를 흥얼거리며 전시회장의 유리문을 열었다. 아침의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은 밝은 붉은 조명이 작품을 하나하나 밝혀주고 있었다. 밝혀준다기보다는 스며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했다. 소라모양의 크로와상에 스며든 버터향처럼, 조명 또한 작품의 일부로 봐야만 한다는 충동이 단조롭게 퍼졌다.
던은 반드시 걸려있던 작품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작품을 걸었다. 다행히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애초에 이 전시회장을 찾는 사람이 자신과 베를 이외에 더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는 차분히 뒤로 몇 발자국을 걸어간다. 필름 카메라를 들어 올려 눈을 가져다 댄다. 숨을 참고 초점을 맞춘다. 빨간 버터향이 파이프 담배에 천천히 빨려 들어간다. 이윽고 셔터를 누른다.
필름이 빛에 노출되며 찰칵, 하고 소리가 났다. 잠시 기다린 뒤 인화된 사진을 가볍게 두어 번 흔들었다. 플라밍고의 목을 연상시키는 붉은 기둥 아래 작품에 사진을 내려놓고 캔버스를 옆구리에 낀 채 다시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시원한 거리의 열기가 몸을 스쳐니 갔다. 여전히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던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열정의 반주에 걸어 들어갔다.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는 거리의 사람들, 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는 어린 밴드, 길바닥에 누워 담배를 피는 젊은 연인.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운 던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상점들의 조명을 배경으로 밴드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캔버스가 빗물에 젖는 것도 모른 채 던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태어나 춤을 한 번도 추지 않은 그였다. 하지만 자신을 에워싼 수많은 사람들의 낙관적이면서도 애처로운 몸짓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몽상가일 뿐이다. 그럼에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실낱같은 빛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한다. 언제 가는 누군가 알아주길 기대하며.
"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던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블런드 단발머리와 플로럴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여자. 소피가 우산을 든 채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어색하고 우스꽝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다 지켜봤겠지, 하고 쑥스러운 던은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뭐야 그 캔버스? 네가 그린 그림이야?"
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줘. 참, 여기서는 말고“ 소피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면 같이 술 마시러 갈래?"
던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내가 특별한 곳을 소개해줄게. 비가 올 때만 열리는 특별한 술집. 영광으로 알아." 소피가 너스레를 떨며 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신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행복한 미소일까 혹은 완성되다 만 물레 도자기처럼 끝이 찌그러진 입꼬리를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