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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Sep 03.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17)

작가의 말 : 9시에 수업이 끝나고 잠이 들어 늦은 시간에 노트북을 켜게 되었습니다.



던에게 마련된 개인 아틀리에는 베를레인 건물의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아틀리에에 들어서니 캘빈을 조절할 수 있는 봄계열 동그라미 조명이 천장에 발려 있었고, 정면에는 다양한 크기의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밝은 톤의 나무판 두 개가 비스듬히 연결되어 있는 리프트 작업 테이블에 각종 물감과 팔레트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던은 은퇴한 프로 화가의 공방을 몰래 엿보는 느낌을 받았다. 옥션하우스 본사에 딸려있는 작업실이기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기대 그 이상이었다. 오로지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다.


'생명의 춤, 폴리 베르제르의 바, 게르티카, 묘지 파는 인분의 죽음' 던은 속으로 작품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번 달까지 모작을 완성시켜야만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작품 또한 갤러리에 걸리게 되리라. 던은 캔버스를 이젤 위에 가뿐히 올린 후, 생명의 춤 사진을 지긋이 들여다보았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어느 정도 구도와 배치가 머릿속에 잡히기 시작했고 던은 거침없이 목탄을 집어 들어 스케치를 시작했다. 샌드위치에 몰래 숨어든 체다치즈처럼 소음을 차단하는 재료가 하얀 벽 사이에 끼어들었는지 외부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뭔가 허전한 느낌으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중심점에 놓인 연인의 스케치가 막 끝나는 참이었다. 소피가 노크도 없이 카피 공방에 들어왔다.


"분위기는 어때?" 소피가 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럭저럭." 던은 목탄을 작업 테이블에 올려놓고 뒤를 돌았다. 소피의 금발이 모노 오피스 차림과 잘 어울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왼쪽 높은 벽에 걸린 시곗바늘은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나 됐나, 하고 던은 처음 작업실에 들어왔던 시간을 떠올렸다. 대략적인 구도를 잡고 목탄을 든 시간이 아마 11시였으니, 약 4시간을 꼬박 스케치에만 몰두한 것이었다. 이제야 헐렁한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캔커피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설탕 카페인의 향 없이 이렇게나 몰 중 할 수 있다니. 던이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몰입이었다.


"점심시간에도 안 내려오니 걱정돼서 올라와봤어. 사실 아까 올라오려 했는데 괜한 방해를 하나 하는 걱정이 들어 관뒀어." 소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작업테이블에 놓인 원본의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케치만으로도 벌써 윤곽이 나오네. 7일에 한 작품이면 말도 안 된다 생각했는데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보통 다른 카피 화가들이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2달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수준이야."


문득 하나의 의문점이 던의 머리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혹시 이 건물에 나 말고 다른 카피 화가도 있어?"


"아니, 너 말고 다른 화가는 없어. 애초에 공방도 여기 한 곳뿐이고. 원래 네가 들어오기 전에 다른 화가가 있기 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지?"


소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회의에서 나온 이야긴데, 베를이 회사의 방향성을 완전히 바꿀 모양이야. 우리 회사가 모조품만 다루는 건 알고 있지?"


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대충은."


"원래 우리 타깃은 미술품에 안목이 있는 중산층이었어. 아무래도 모조품을 사려는 상류층은 많이 없으니까." 소피가 말하며 잠시 깍지를 끼고 몸을 쭉 뺐다. "하지만 이제 상류층을 공략하려는 모양이야. 가능할지 모르겠어. 그렇게 돈이 많은 사람들이 굳이 가품을 사려고 할까? 아무리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번 결정은 그와 같은 마음이야." 소피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아, 하고 작게 탄성을 흘렸다. "듀란이라고 우리 회사 부사장, 전혀 정이 가지 않는 사람이야. 회사가 자기 것 마냥 행동하고, 정말이지 왜 베를이 안 자르고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소피가 말을 마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회사에서 자기 나이 또래를 처음 만나 신났는지, 그 뒤로도 소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듀란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부터 시작해서, 갤러리 오픈 계획과, 이름 있는 화가 연맹을 중심으로 여론을 형성할 구체적인 방법까지. 당장 의뢰를 마치고 자신만의 새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어져 있는 던은 소피의 말에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던은 소피가 말을 하며 혼자 흥분을 하거나 언성이 높아지면 맞장구를 쳐주었고, 던이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을 하고 있다 느꼈는지 소피는 하나의 주제가 끝날만 하면 또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어느덧 퇴근할 시간에 가까워지자 소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빠르게 말을 멈추고 또 봐,라는 말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날 뒤로 소피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던은 스스로도 느낄 만큼 작업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창백한 색채를 입히기 전 시간을 두고 정밀 분석을 하려 했었지만 손이 저절로 조화로운 팔레트로 향했고 의도한 대로 색채와 질감이 구현되었다. 발표되지 않은 정답지를 옆에 두고 신문지의 십자낱말 퀴즈를 푸는 것처럼 매우 순조로웠다. 작업을 시작한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던은 옥션하우스의 빛을 받는 자신의 모조품을 두고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우아한 손짓과, 고급 양복, 캐시미어 스카프와 어딘가 쓸쓸한 표정을 한 은갈치 노인까지, 경매라곤 한 번도 참여해보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그려졌다. 자신이 그린 다른 화가의 작품이 비싸게 팔린다면 자부심을 느껴도 될까? 그때의 자신이 느낄 감정은 무엇인가, 붓질을 서서히 멈추고 자신의 오리지널작인 파이프담배를 떠올렸다.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딘가 싸늘해 보인다. 불규칙하게 끊긴 철도레일처럼 자신의 작품에 어딘가 빈 공간이 느껴진다. 무엇인가 온전하게 담겨 있지 않다. 베를이 말한 그 무엇인가, 하지만 아무리 오래 떠올려보아도 감조차 오지 않았다. 색채, 배치, 질감, 배열, 하나하나 따져보아도 작품을 망칠만한 요소는 없다.


 던은 다시 집중을 하기 위해 각진 작업테이블 위에 올려진 캔커피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손목을 살짝 기울여 내용물을 입에 머금고 라디오를 켰다. 벽선반에 놓여있던 라디오였다. 라디오에서 호스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똑 부러지면서도 나른한 목소리에 잠기며 던은 다시 붓질을 시작했다.


'"속보입니다. 오늘 새벽, 파리 국립 박물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인 '해바라기'가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경찰은 범인을 추적 중이며, 박물관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이번 도난 사건은 예술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으며, 작품의 행방에 대해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소식은 추가로 들어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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