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 선출직인 대통령의 권한 행사를 사법부에서 제한하는 것이 민주적으로 정당한가? 하는 물음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잠에서 일어난 던은 필름 카메라를 목에 걸고 예술의 거리로 향했다. 생명의 춤, 폴리 베르제르의 바, 게르니카, 묘지 파는 인부. 한 달에 걸쳐 복제해야 하는 작품들이었지만 예술가의 혼이 손에 깃든 듯 눈 깜짝할 새에 끝내 버렸다. 스스로도 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굳이 미묘한 터치 질감, 0.1 mm 단위의 배치 등에 사소한 신경을 쏟지 않았지만 그린 후에 보니 사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베를도 완성작을 보더니 자신의 상상 이상이라는 듯 감탄을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 참, 말해주는 것을 잊었다네. 자네의 작품을 이번에 새로 오픈하는 갤러리에 전시하려 하는데 따로 요구 사항이 있나?" 베를이 말했다.
"혹시 사장님과 처음 만나 곳, 그 전시회장에 걸어 주실 수 있나요?" 던이 말끝을 살짝 흐렸다.
"물론일세,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전시장이라 앞으로 예술가로서의 계획을 생각하면 새로 오픈하는 갤러리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물론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베를이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전시회장에서 사진을 찍는 나날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완성하지 못했을 거예요. 붓질을 하면서도 시멘트 기둥에 걸려있는 완성작을 끊임없이 상상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아마 새로 오픈하는 갤러리에 제 작품이 걸려도 별 소용이 없을 듯해요." 던이 시선을 땅에 고정시킨 채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대답했다.
잠시 침묵을 지킨 베를이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한 말이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건가?"
"무슨.. 말이요?"
회색 공사차림과 까만 광택 구두의 이질적인 남자와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베를이 동시에 말한다. "자네의 작품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말."
던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베를은 알겠다는 듯 작품을 챙겨 나갔고 적막만이 아틀리에를 무겁게 짓눌렀다. 듀란이란 남자도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인테리어 소품. 듀란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예술가를 꿈꾸는 던에게 있어 치명적인 말이었다. 아무리 첫 작품이라 한들 나름 흡족하게 여겼는데 이런 평가라니, 정말 자신에게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닐까. 남은 캔커피를 모조리 삼키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한번 긴급 속보를 전해드립니다. 최근 들어 계속해서 미술품 도난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무려 10점의 유명한 작품이 한꺼번에 사라졌습니다. 도난당한 작품들 중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모네의 '수련', 그리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파리의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었는데요, 현재 경찰은 대규모 수사를 벌이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경계가 강화된 상태입니다. 앞으로의 추가 소식도 신속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유명한 작품들이 차례차례 도난당하고 있다. 아무래도 미술계에서 큰 이슈인 모양이다. 하루종일 라디오에서는 이 내용만이 되풀이돼서 흘러나오고 있다. 만일 원본이 전부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순간 혹시, 하고 던의 머릿속에 무시무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제의 기억이 점점 선명해지고 소름 돋는 전율이 스멀스멀 몸을 퍼져나가기 시작할 때쯤, 반구형의 전시회장에 앞에 도착했다. 던은 유리문을 조심스레 열고 고개를 먼저 밀어 넣었다. 터질듯한 파이프담배의 색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퍼져나갔던 전율이 순식간에 흡수되었고 던은 엄청난 카타르시스와 함께 짜릿함을 느꼈다. 자신은 몽상가에 그쳐있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간다. 그리고 이 작품이 자신의 발자국이 되리라. 어둑한 노랑 조명을 받는 기둥과 자신의 작품, 금테 액자 밑에 조그마한 캡션이 이어 기둥에 달려있다. 던은 소리 내어 한 글자씩 읽기 시작했다. <균열의 순간, 던>
얼른 목에 건 필름 카메라를 들어 올려 사진을 담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지긋이 감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이 놓치고 있는 혹은 담아내야만 할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아무리 보아도 캔버스 위에 낭비된 공간은 없었다. 제한된 색채 또한 적절한 입체감을 부여해 주었기에 추가적인 컬러작업이 필요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자유로운 색채를 사용해 조화를 담아낸다면 아무래도 평면감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던은 계속해서 시선을 좁혔다 늘려 보았지만 부족한 점을 찾기는 힘들었다. 계속해서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깨닫게 되겠지, 사실 아무 문제가 없는 온전한 작품일 수도 있고,라고 생각하며 던은 곧장 전시회장을 나왔다. 스타트라인을 막 통과한 기쁨을 언제까지고 느끼며 멈춰있을 수 없다.
'나는 세상을 놀라게 할 화가가 된다."
던은 다음 작품을 생각하며 베를레인 건물의 공방으로 향했다. 1층에 들어서니 어딘가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곳곳에서 짜증과 큰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소피의 목소리였다. 당황한 듯한 높은 톤의 목소리, 그녀의 음성이 사장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30명이 동시에 말없이 출근을 안 했다니. 전부 연락이 안 되는 것도 확실하지?" 말과 동시에 철컥하고 다이얼 수화기가 연결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벌어진 듯했다. 던은 호기심에 천천히 사장실로 다가갔다. 자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장실 앞에 귀를 대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던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고 소피와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레 던과 눈이 마주친 소피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깜짝이야. 노크를 해야지."
던은 소피가 자신을 찾아올 때 노크를 한 적이 있나, 하고 잠시 떠올려 보았다.
"아, 어제 듀란, 아니 부사장님이랑 대화 나눴었지. 이상한 점 없었어?" 소피가 고개를 살짝 내밀며 말했다. 어딘가 다급한 목소리였다.
"이상한 점?"
"오늘 출근을 안 해서.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동시에 부사장님에 관리하던 회수팀이랑 경매부서 몇 명도 출근을 안 했어.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연락을 안 받아. 아무래도 뭔가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전부터 알아봤었는데." 소피는 몹시 화가 난 듯했다. 동시에 걱정스러운 듯 혀로 입술을 핥으며 손바닥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아무튼 이상한 점은 없었다는 거지? 난 다른 부서에 가봐야 해서 먼저 가볼게. 혹시 볼일이 있었다면 저기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줘. 베를, 아니 사장님도 계실 거야. 어쨌든 이만 가볼게" 소피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재빠르게 사라졌다.
던이 쭈뼛거리며 사장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느긋이 차를 마시고 있는 베를과 눈이 마주쳤다. 건물의 분위기로만 봐서는 상당한 위급상황인 듯한데 베를은 아무 걱정 없다는 듯 꽤나 차분했다.
"마침 잘 왔네, 대화 상대가 필요한 참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