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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Sep 04.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21)

작가의 말 : 가능성이 눈앞에 놓여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아마 도박에 빠져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한때 열심히 이론을 공부한다면 도박에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각종 관련 원본과, 이론을 모조리 외웠었죠. 실전에서 저는 돈을 많이 벌었을까요?



어릴 적부터 교양으로서 수많은 스포츠를 배웠던 베를이지만 정장 차림으로 꼬마를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열심히 뒤를 쫓았지만 어느샌가 꼬마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거리는 수많은 예술가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태양이 잠들기 시작하며 거리는 황혼의 색으로 덮이기 시작했고 베를은 망연자실하며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줄지어 선 가게들을 눈으로 훑으며 가지각색의 무명 밴드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특이한 음색과 살짝 뒤틀린 듯한 화음, 우연히 마주쳤다면 분명 자연스레 끌렸겠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몇 미터 간격으로 밴드들이 거리에 나와 공연을 하고 있었고 그들 모두 개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기에 오히려 너무나도 평범하게 느껴졌다. 반짝이기만 하는 보석들이 줄줄이 진열되어 있다면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되는 것처럼. 그럼에도 따로 분리해 시간을 들여 하나씩 감상한다면 분명 너무나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무리 강물을 유유히 저어 가는 백조들 사이에서 블랙 스완이 유독 눈에 띈다지만 모두가 검정 빛의 깃으로 치장하고 있다면 블랙스완이 시선을 끄는 일 따위 없을 것이다. 베를은 우연히 마주친 좀 전의 작품을 떠올려 보았다. 형체가 없는 듯하면서도 그럼에도 분명한, 선들의 집합체. 한 번 더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감상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상점들의 찬란한 빛이 점점 붉어지고, 거리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유일한 달을 반기기라도 하는 듯 사람은 더욱 많아졌고 밴들들의 소리 또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베를은 얼마나 걸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사람은 계속해서 많아졌지만 시선에 머물던 줄지은 술집들의 간판은 점점 뜸해졌다. 그러다 붉은 조명 아래 걸린 통유리를 보는 순간 베를은 자신이 홍등거리에 들어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매혹적인 짙은 향수 냄새가 베를의 코를 찔렀다. 유리 안에서  몸을 거의 가리지 않은 다양한 나이대의 여자들이 눈길을 보냈고 몇몇은 속옷을 내려 자신의 가슴을 내보이기도 했다. 베를은 현혹되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거두어 최대한 정면만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끝을 모르고 이어진 유리창 탓에 정면을 보아도 육감적인 몸매의 여성들에 계속 눈을 빼앗겼다.


호객꾼들은 멋모르는 젊은이들을 낚기 위해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미끼를 문 몇몇은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호객꾼을 따라 통유리 중간중간에 나 있는 입구로 들어갔다. 홍등거리는 호객꾼들의 현란한 말과, 술에 취한 무리들의 여자 이야기, 욕을 하며 유리 옆 입구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거친소리들로 가득했다.


잘못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은 베를이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려 발거음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등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를이 분명 아는 목소리였다. 캔버스를 훔쳐 달아난 꼬마아이, 분명 그 꼬맹이의 목소리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린 베를의 시야에 지나가는 사람의 손을 붙잡으며 호객행위를 하는 아까 전의 도둑 소년이 들어왔다. 베를은 조용히 다가갔다. 마침 한 남자가 소년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고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욕을 내뱉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뭐, 뭐예요." 뉴엘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뒤로 뺐다.


"잠시만, 내 얘기 좀 들어봐" 도망가려는 뉴엘의 어깨를 황급히 잡으며 베를이 외쳤다.


뉴엘은 깊게 한숨을 뱉은 후 고개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 도둑 아니라고요. 어차피 믿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아마 거의 완성되어 가던 훔친 작품에 한 두 줄 그려놓고 자신의 작품이라 우기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한 베를은  일단은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까는 미안했어. 너무 훌륭한 작품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용서해 주겠니?"


"그, 그래요." 베를의 다정한 말투 때문인지 뉴엘은 윽, 하고 표정을 풀며 답했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이 따로 있니?"


"작업실이요?"


"그래, 작업실. 네가 그림을 그리는 장소 말하는 거란다."


뉴엘은 알겠다는 듯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서 좀 멀어요."


"혹시 안내해 줄 수 있니? 너무 궁금하거든."


베를은 뉴엘을 따라 홍등거리를 지나쳤다. 술 취한 사람과 부딪혀 싸움이 날 뻔했지만 뉴엘이 말려 겨우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홍등거리에 있는 모두가 뉴엘을 아는 듯했다. 가끔씩 뉴엘을 알아보고 돈을 쥐어주는 사람도 있었고, 뉴엘은 당연한 듯 돈을 챙겨 헐렁한 노랑 바지 주머니 속으로 꾸겨 넣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붉은 등은 점점 사라지고 빛이 바랜 빈민촌이 나왔다. 옹기종기 모인 멘션들은 서로를 지탱해 주며 위태롭게 버티는 듯했고 언제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듯했다. 고개를 조금 들면 여러 줄들이 이 집과 저 집을 이어주었는데, 아무래도 빨래를 널어놓는 용도인 것처럼 보였다. 베를은 고여 썩은 듯한 하수구 냄새에 머리가 아팠지만 뉴엘 익숙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갔다. 인공적인 빛은 점점 사려져 가고 깊이 모를 어둠 속에 들어가는 느낌을 받은 베를은 어딘가 조금 무서워졌다.


"거의 다 왔어요. 여기, 제 손 잡아요. 이제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예요."


베를은 뉴엘의 말에 걷는 내내 아래로만 향하던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거대한 기둥이 일자로 늘어선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목을 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기둥이 아닌 나무였다. 주름진 나무 사이로 내비치는 숲 내부는 말 그대로 암흑 그 자체였다. 무엇을 만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생각과 함께 베를은 뉴엘의 손을 잡았다.


베를은 깊은 바다의 표면,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달빛은 거대한 나무들의 새까만 잎이 만들어내는 촘촘한 천장을 뚫지 못하는지 눈은 암순응을 잊었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어둠 그 자체였다. 말라비틀어진 잎을 밟는 소리 또한 나지 않았다. 오로지 손을 통해 전달되는 뉴엘의 따뜻한 감촉만이 느껴졌다.


"다 왔어요."


기묘하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뉴엘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거대한 나무가 동떨어진 듯 홀로 서 있었고,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온전히 독차지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평면감만 느껴지는 어둠뿐이었다. 나무 밑에는 붓, 물감통, 캔버스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뉴엘은 옛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갑게 뛰어갔다.


"여기가 제 그림 그리는 공간이에요. 아까 뭐라 했었죠?"


"작업실"


"맞아요. 작업실. 여기가 제 작업실이에요. 제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 보실래요?" 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넘어진 캔버스를 일으켜 세웠다. 캔버스는 온통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중간에 하얀 찢어진 원이 그려져 있었다. 하얗다기보다는 투명에 가까웠다. 마치 캔버스의 중심을 망치로 부순 후 그곳을 유리로 채운 것처럼. 하지만 유리 속으로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베를은 아까와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그림인 탓인가. 그림이라고 부르기도 묘하다.


베를은 그때를 회상하며 소파에 앉아 어딘가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베를레인의 카피화가 던에게 말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추상화라는 개념이 없었다네. 항상 무언가 객관적인 실체를 담아야 했지.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본 뉴엘의 그림은 그 어떤 유명한 화가의 그림보다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네." 말을 마친 베를은 다시 말을 이었다.


"뉴엘은 몸을 파는 어머니와 이름 모를 남자 사이에서 나온 아이였다네. 당연히 유명한 예술가들의 그림을 본 적도, 그려본 적도 없었겠지. 그 녀석의 어머니는 입술의 립스틱 색깔이 연하다는 이유로 손님에게 맞아 죽었다네. 참 허무한 죽음이지 않은가. 그래도 나름 고운 심성을 가진 여인이었는지, 동료였던 홍등가의 여인들이 죽은 그 녀석의 어머니를 대신해 다 같이 키우고 있었지. 그녀들이 없었다면 아마 바로 팔려나갔을 거야. 어린아이의 장기는 꽤나 돈이 되는 시대였으니 말이지." 베를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아까 조금씩 마시지 않고 내려놨던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하고 던이 생각했다.


그때 소피가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그녀에게 노크란 개념은 아예 없는 것인가. 베를과 던이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소피가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베를, 아니 죄송합니다. 사장님, 듀란, 아니 죄송합니다. 부사장님이 아무래도 저희 직원들을 빼내 새로운 회사를 차리려는 모양입니다."


베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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