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식 Sep 05.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작가의 말 :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합니다. 소수의 사례를 보고 헛된 망상에 빠지지 말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트렌드가 바뀌고 있는 것이죠. 각광받던 자기 계발서에는 점점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런 시대 흐름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모든 꿈 꾸는 사람을 응원합니다. 나중에 당당히, 누구나 간절히 노력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을 내뱉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다음에 또 얘기하기로 하지." 베를이 던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던은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여기 있어도 괜찮다네. 오히려 자네도 같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일세. 소피, 더 자세히 말해주겠나?" 베를이 말을 마치고 소피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로이에게 들었습니다." 소피가 일어선 채로 말했다. 던을 힐긋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로이는 문라이트 화가연맹에 소속된 화가 중 한 명이야. 표면적으로는 말이지.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어." 아무래도 자신에게 말한 듯한 느낌을 받은 던은 얼떨결에 알겠어,라고 대답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로이에 따르면 문라이트를 중심으로 새로운 옥션이 열린다는 소문이 도는 모양입니다. 엄청난 작품이 경매에 나올 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소문의 근원은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듀란밖에 없죠." 소피가 화가 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억측은 좋지 않다네. 소피." 베를이 말했다. 던은 슬며시 베를의 얼굴을 살폈지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온화한 표정이다.


"억측이 아닙니다. 화가연맹과 각종 길드에 스파이를 심은 것도 듀란이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그림 말고 관심이 없는 연맹사람들이 옥션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증거입니다. 옥션이 열리는 장소와 시간에 대한 정보가 나오게 된다면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사라진 직원들 명단을 확보해야 하기에 다시 나가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내일은 회사에 오지 않고 바로 섬으로 가겠습니다. 창고에서 도난당한 작품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소피는 말을 마치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도난, 던은 소피의 말을 듣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진행자의 또박한 음성이 생각났다.


"속보입니다. 오늘 새벽, 파리 국립 박물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인 '해바라기'가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경찰은 범인을 추적 중이며, 박물관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이번 도난 사건은 예술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으며, 작품의 행방에 대해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소식은 추가로 들어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섬이라니, 베를이 말했던 창고가 섬에 있다는 말인가, 던은 베를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온화한 표정 그대로다. 던과 눈이 마주친 베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지금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으로 그치기로 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라는 말을 시작으로 베를이 추억을 꺼내기 시작했고 온화하다고만 생각됐던 표정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놀라운 그림이야." 베를이 뉴엘에게 말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칭찬에 뉴엘은 신나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이 공간과의 첫 만남,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까지. 사실 이미지에 한해서 베를은 뉴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문장의 대부분이 콰앙, 슈융 같은 의미모를 의성어와 의태어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게 재밌니?" 베를이 나무에 등을 기대앉으며 말했다.


질문을 받은 뉴엘은 음, 하고 한참 고민하다 대답했다. "가끔 내 안에서 이상한 물고기들이 튀어나와, 날아다니는 물고기, 아, 이름이 뭐였더라."


"청어"


"청어?"


"청어라고 한단다."


베를에 짧은 말에 뉴엘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청어가 엄청나게 뛰어다니는 날이 있어, 내 안에서. 한 번 시작되면 끝을 모르고 날아다녀서 내 몸 이곳저곳에 부딪혀. 내 몸을 찢고 나오려는 것처럼. 엄청 아팠지만 붓을 들고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면 청어들이 사라지는 게 느껴져. 완전히 잠잠해지면 엄청나게 기분이 좋아져. 아까 그림 그리는 게 재밌냐고 물어봤지? 엄청 재밌고 또 기분이 좋아.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면 좋겠어." 뉴엘이 말을 마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베를은 뉴엘의 말을 듣고 청어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군, 하고 다시금 상상을 이어나갔다. 그림을 그리는 뉴엘의 붓을 통해 청어들이 하나 둘 캔버스에 빠져든다.


그 뒤로 베를은 매일같이 숲벽 안 어둠 속 한 줄기 빛의 공간으로 찾아갔다. 대부분의 날에 뉴엘은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은 채 캔버스에 붓질을 하고 있었고 베를은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나무에 기대앉아 내면의 청어를 전부 쏟아내는 뉴엘의 손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뉴엘이 홍등가의 호객행위 탓에 없는 날에는 몰래 물감을 채워놓고, 빈 캔버스들을 나무 옆에 새워둔 채 완성된 뉴엘의 그림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오랫동안 감상했다.  


"아, 왔으면 말을 하지. 깜짝 놀랐잖아." 붓질을 멈추고 눈을 뜬 뉴엘이 말을 했다.


"미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베를이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후, 주머니에서 인화된 사진을 꺼내 뉴엘에게 들이밀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라는 작품이야. 한 번 그려볼래? 잘 그렸다 싶으면 내가 살게."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 채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보던 뉴엘이 말했다. "한 번 그려볼게. 내일 다시 와줘. 하루면 그릴 수 있을 거 같아."


"하루?"


"응,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아. 그냥 해바라기잖아. 날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아무리 나라도 해바라기가 어떤 식물인지는 알아."


베를이 그 얘기가 아닌데, 하고 말을 이으려다 멈췄다. 사진만 보고 완벽히 재현하는 것도 무리지만, 하루 만에 그리는다는 쪽이 더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진지하고 동시에 천진난만한 뉴엘의 눈동자를 보니 도저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베를은 다음날, 다시 그곳을 찾았다. 평소라면 일어나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는 뉴엘이 있을 텐데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베를은 엎어져 있는 캔버스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 옆에 뉴엘이 몸을 축 뻗은 채 잠들어 있었다. 문득 호기심이 들어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캔버스를 들어 올렸다. 캔버스를 본 순간 베를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해바라기'. 캔버스 안에는 생생한 반 고흐의 해바라기 담겨 있었다. 베를은 캔버스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인화된 그림이 아니다. 이 캔버스에 담겨 있는 해바라기는 분명 저 소년이 그려낸 것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림을 배우지도 않은 빈민가의 소년이 사진만 보고 그려내다니, 분명 어딘가 트릭이 있을 것이다. 베를은 황급히 뉴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 깜짝이야." 눈을 뜬 뉴엘이 베를을 보고 소리 질렀다.


"저거 네가 그린 거야?" 베를이 입을 크게 벌리며 물었다.


"응, 금방 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그냥 여기서 잤어." 뉴엘이 눈을 비비며 태연하게 말했다.


베를은 다시 한번 전율을 느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자신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다. 세상을 놀라게 할 화가, 어릴 적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꿈. 이 아이라면 가능하리라.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네가 좋아하는 그림 하루종일 그릴 수 있을 거야." 베를이 말했다. 뉴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세상을 놀라게 할 화가가 될 거야. 내가 보장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