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식 Sep 04.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작가의 말 : 열심히 노력해서 20점을 80점으로 만드는 것과 적당히 노력해서 80점을 98점으로 만드는 것, 둘 중에 어떤 결과가 더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제 인생모토는 적당히 노력해서 꽤 좋은 결과를 내자, 였습니다. 입시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해 왔죠. 결과는 항상 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소설 쓰기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시작했습니다. 적당히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스토리를 짜고 쓴다면 많은 사람들이 읽겠지. 제 착각이었습니다. 25살이나 먹은 이제야 깨닫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야든 잠깐 이름을 알리기 위해선 피가 나는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요.



"참, 자네의 작품은 오늘 아침에 창고로 보내졌네. 도난 사건으로 시끄러운 모양이지만 우리 베를레인의 작품에 한해서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네. 웬만한 사람들이 아니면 창고의 위치를 알 수 없지."


"갤러리에 걸리는 게 아니라, 창고로 보내지는 건가요?" 던이 말하고 소파에 주춤거리며 앉았다.


"형체가 있는 모든 것들은 숙성되는 시기가 필요해. 단지 창고에 보관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간들이 작품에 훨씬 깊은 풍미를 더해주지. 사람의 손을 거쳤다면 어느 정도 창작자의 혼이 스며들기 마련이고 그 혼이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네. 설령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단지 창고에 박아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야." 베를이 말을 하며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곧바로 눈을 감고 향을 음미하더니 마시지 않고 그대로 내려놨다.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이번에 새로 갤러리를 오픈한다고 들었는데 거기에는 어떤 작품들이 걸리는 거죠?"


"우리 회사는 갓 땅에서 나온 지렁이가 아닐세. 충분한 시간을 들여 영양분과 수분을 흡수해 왔지. 알다시피 자네가 오기 전부터 카피 화가가 있었어.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그들의 작품이 걸리게 될 거야. 아, 자네의 작품은 예술의 거리에 있는 반구형 전시회장에 전시되어 있다네."


"아, 오늘 아침에 보고 왔어요."


"소감이 어떤가."


"이제 시작이죠. 그러고 보니 제가 오기 전에 카피 작업을 맡으셨던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던의 말에 베를은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시대를 잘못 만난 예술가였지."라는 말로 베를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베를은 예술에 거리에 위치한 반구형 전시회장을 오픈하면서 관리 차 자주 방문하던 시기였다. 그때 당시만 해도 거리에서 작품을 파는 무명 화가들이 거리에 넘쳐났었다. 하지만 무엇하나 베를의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은 없었다. 똑같은 색배열과 훔쳐온 듯 한 구도, 겉보기에는 그럴싸했지만 미술가를 준비했던 베를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던 것이다. 플롯을 그대로 가져와 등장인물만 살짝 바꿔 출판한 소설처럼 거리에 즐비한 작품들에는 전혀 작가 개인의 주제가 담겨 있지 않았다.


여느 날과 같이 전시회장에서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색채를 발견했다. 잘 못 봤나, 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찰나의 순간, 각인된 강렬함이 베를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게 했다. 그 흔한 디스플레이 스탠드도 없이 캔버스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베를은 거리의 연주를 들으며 작품에 다가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선들이 무방비하게 캔버스를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그곳엔 분명히 조화가 존재했다. 선과 선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점, 그 점들은 곳곳에 존재했고, 무작위로 흩어진 점들이 한 번에 인식되며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경험하게 해 주었고 동시에 윤곽에 갇힌 형체 따위 없었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극적인 형체감을 내비쳤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요?' 베를의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리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입을 삐죽 내민 꼬마소년이 서 있었다. 벽돌길에 두세 번 문지른 듯한 해진 민소매와 언제라도 흘러내릴 듯한 헐렁한 노랑 반바지. 딱 보기에도 빈민가에서 온 듯했다.


"꼬마야 돈 필요해?"


젊은 시절의 베를에게는 편견이 희미하게 존재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꾸준히 들어온 이야기도 빈민가 출신 사람들과는 최대한 엮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잃은 것이 없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돈을 구걸한다면 적당히 쥐어주고 보내야 한다. 끈질기게 달라붙는다면 그때는 주저 없이 총을 사용해야 한다. 어린 베를은 부모님의 말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부모님도 마찬가지. 그들의 태어난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자본뿐 아니라 사회문화까지 대물림 되는 세계, 소수의 빈민층과 나머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세계였다. 색볼펜의 여러 잉크심들처럼, 같은 플라스틱 몸통에 존재하지만 섞여서는 안 됐다.


"왜? 저 그림 사려고?" 꼬마가 기분 나쁜 듯 퉁명스럽게 말하며 그대로 길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캔버스의 윗부분을 자신의 무릎 쪽으로 올려 살짝 세워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꼬마야, 모든 작품에는 혼이 깃들어 있단다. 그 작품에도 말이지. 아무리 이름이 쓰여 있지 않더라도 주인이 있다는 말이야. 돈은 내가 줄 테니, 작품은 건들지 마렴." 베를이 말하며 쪼그려 앉아 꼬마와 눈높이를 맞췄다.


꼬마가 베를을 흘깃 노려보며 작품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안 살 거면 저리 가. 그리고 아저씨,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거 내가 그린 거야."


베를은 꼬마와 작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거짓말하면 못 써. 아저씨가 미술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척 보면 알지. 너 같은 꼬맹이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야. 어디서 훔쳐온 거니?" 베를은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당시만 해도 빈민층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에스프레소 커피에 사실은 카페인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더 믿을 만했다. 상상력을 형태로 구현하기 위한 도구들만 해도 값이 상당했을 뿐 아니라, 빈민가의 사람들로서는 그 흔한 캔버스만 해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끔가다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도 고급 창부에 관련되서만 가능한 이야기였다. 종종 홍등가에서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는 젊은 귀족들이 창녀를 데리고 나왔고 그녀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승마와 미술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창부들이 세상을 놀라게 할 그림을 선보이곤 했지만 정말 소수의 이야기다. 게다가 지금 눈앞의 이 아이의 거칠고 투박한 손만 봐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붓을 잡아보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베를은 주머니에서 빳빳한 종이 지폐를 꺼내 꼬마에게 건넸다. "자 받아, 작품은 이리 주고." 베를이 타이르듯 말했다.


"더 줘, 이거 그리느라 2일은 못 잤단 말이야. 적어도 3일 맘껏 먹을만한 돈은 받아야겠어." 꼬마가 말했다.


"돈은 줄 테니, 어디서 훔쳐온지 말해. 너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상당히 놀라운 작품이야. 주인을 만나야겠어."


"내가 주인이라고." 꼬마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 키의 절반 정도 되는 캔버스를 들고뛰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베를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이 날이 베를과 뉴엘의 첫 만남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