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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Sep 08.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리빵 조각들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24)

던은 집에 들어와 라운드넥 셔츠와 폴리 소재의 바지를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흐르는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베를이 말한 천재 화가 뉴엘을 떠올렸다. 그는 어째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조용히 번개탄을 피웠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붓을 들고 캔버스를 마주한다면 언젠가 다시 그려질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샤워를 마치고 잔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벽에 걸린 인화된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고흐와 피카소 그 옆엔 달리, 알만한 화가들 뿐 아니라 생소한 작품들까지 촘촘히 줄지어 포스트 되어 있었다. 이 작품들도 뉴엘이 그린 것인가, 그의 천재성이라면 가능하리라, 그럼에도 하루에 한 점의 속도로 그렸다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퀄리티였다. 잠시 후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던은 방을 나왔다. 어딘가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걷고 싶을 뿐이었다. 차례차례 도난되는 유명 작품들, 베를라인을 말없이 떠나간 듀란과 그의 직속 직원들, 그리고 거리에 떠도는 소문들. 그 사이에 일종의 연결이 있지 않을까, 하고 던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줄지어 있는 단란한 상점들은 달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고 꽤나 운치 있는 정경을 그려냈다. 수많은 인공적인 조명들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별빛은 자신의 존재감을 고스란히 드러내 던은 분리된 위아래 세계의 중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던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 있었고 호기심을 느낀 던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의 중심엔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두 남녀가 이었다. 자신과 나이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 듯했다. 남자의 주먹이 정통으로 여자의 복부에 꽂혔고 여자는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동시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관중들 중 어느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쓰러진 여자를 보며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서 몸이나 팔지 그래. 몸은 그럭저럭 봐줄만하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틀거리며 일어난 여자가 남자의 가랑이 사이를 발로 가격했고 남자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관중의 반은 야유를 보냈고 나머지 반은 흥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니 거시기는 얼굴만큼이나 형편없네. 타격감이 전혀 없잖아?” 여자가 입 주변의 피를 닦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여자의 말에 환호성이 일었다. 던은 이발기로 대충 민듯한 짧은 갈색머리에 민소매 셔츠를 입은 여자에게 묘한 끌림을 느꼈다. 여자는 터벅터벅 관중들을 향햐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반으로 갈라지고 여자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저 년 내가 가만 안 둬.” 남자가 엉거주춤하며 일어나더니 구경꾼 중 한 명의 손에서 빈 술병을 낚아채 여자의 등을 향해 뛰어갔다. “거기 안 서?”


하지만 남자의 병은 여자의 머리에 닿지 못했다. 관중들이 달려가 남자를 제압하고 마구 밟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소란에 잠시 뒤를 돌아 남자를 보고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미 끝난 싸움에 비겁하게 뒤를 노려?”


“넌 더 맞아야 돼.”


“다들 와서 좀 밟아요.”


구경꾼들은 합심해 남자를 밟기 시작했다.


“아무리 길거리 싸움이라도 룰이 있는 법이야. “


참 신기한 사람들이네,라고 생각하며 던은 몸을 돌렸다. 여자를 따라가야겠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기 때문이다. 던은 조용히 여자의 그림자를 밟아가며 따라가기 시작했다. 상점가를 지나쳐 어느새 거리에는 붉은 조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베를이 말한 홍등거리인 모양이다. 특유의 찌든 담배냄새와 술냄새가 코를 진동해 던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붉은 등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투명한 유리벽 안에는 거의 몸을 가리지 않은 여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때 거울을 들고 앞머리를 쓸어내리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여인은 거울을 내리고 던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고 어쩔 줄 모르던 던은 어정쩡하게 머리를 숙여 답례를 했다. 여인은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 손짓을 했다. 무시하고 다시 앞을 보고 지나치려던 순간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던에게 다가왔다.


“못 보던 얼굴이네. 찾는 여자라도 있나?” 캡모자를 쓴 남자가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걸었다. 험해 보이는 인상에 살짝 공포감이 든 던은 아닙니다, 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던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냥 가려고? 방금 저 여자랑 인사하지 않았나? 그럼 돈을 내야지. 여기에 공짜는 없어.” 말을 마친 남자가 금니를 보여며 씩 웃었다.


“전 돈이 없어요. 길을 잘 못 들어 우연히 왔는데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던이 정중히 얼버무리며 다시 여자를 따라가려 했지만 여자의 등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건 네 사정이지. 돈이 없으면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벗고 가. 꽤 값이 나가 보이네.” 다른 한쪽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던의 목옷깃을  들어 올렸다.


던은 그제야 자신이 입고 나온 옷을 떠올렸다. 베를이 자신의 매일 똑같은 옷차림을 보고 선물해 주었던 옷이다.


“오. 코샤네.” 캡 모자의 남자가 얼굴을 던의 몸으로 바싹 붙이며 말했다.


“코샤?” 다른 한쪽이 멱살을 풀며 옆의 남자에게 반문했다.


“유명한 브랜드야. 중고로 팔아도 100은 훌쩍 넘길 거야. 부잣집 도련님인 모양이네. “ 캡 모자의 남자가 말을 한 뒤 모자를 잠시 벗어 머리를 쓸어 넘긴 뒤 다시 모자를 썼다. “아무래도 우리가 땡잡은 모양이야. “


“적당히 해.” 남자 두 명의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두 명은 뒤를 돌아보았다.


“오, 엠마 언제부터 거기 있던 거야.” 캡 모자의 남자가 반갑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아까부터. 얘는 그냥 보내줘.” 엠마가 말했다. 그리고는 던은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나를 따라오던데 무슨 볼일이지? “


엠마, 구경꾼들 틈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가까이서보니 꽤나 수수하면서도 이쁜 얼굴이었다. 거친 목소리와 말투에 비해 보랏빛이 배어있는 눈동자만큼은 무척이나 맑아보였고 머리를 기른다면 소피만큼이나 이쁠 정도로  부드러운 선의 이목구미를 가지고 있었다.


“대답 안 해?” 엠마가 던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았다.


“아.. 아까 싸움을 보고 저도 모르게 끌려서 그만. 말도 없이 따라갔던 건 죄송했습니다. 꼭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서.” 던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던의 말에 엠마가 씩 웃더니 말했다. ”네가 질 나쁜 놈이 아니란 건 알고 있어. 얼굴에 쓰여 있으니까. 나랑 얘기해보고 싶었다고? “


던은 고개를 재빠르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따라와.” 엠마가 피식 웃으며 손짓을 했다. “얘는 내가 데리고 가볼게.”


덩치 큰 두 남자가 인상과는 다르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래 또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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