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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Sep 06.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작가의 말 : 어째서인지 밖에 나가기가 귀찮아지는 요즘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집순이가 되어버렸을까요.




베를은 회사에 뉴엘을 위한 개인 작업실을 만들어 주었다. 처음에 반대하던 듀란도 뉴엘의 그림을 보고 난 후 납득을 했다.


"형, 아예, 모조품만 취급하는 건 어때? 저 녀석 속도면 굳이 힘들게 작품 구하러 안 돌아다녀도 될 거 같은데." 듀란이 말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뉴엘은 매일같이 작업실에 나와 그림을 그렸고, 3일에 한 번은 유명 작품의 카피를 했다. 원본 작가가 있다는 사실은 뉴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 빠져들어 한 번 붓을 들면 몇 시간이고 꼼짝하지 않았다. 베를은 종종 뉴엘의 손을 잡고 화가연맹의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추상적이면서 강렬한 뉴엘의 그림에 압도되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뉴엘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뉴엘이 빈민가 출신이라는 점도 한몫하는 듯했다. 듀란은 그들을 보며 심한 욕을 하곤 했다. "작품의 진정한 가치도 알아보지 못하는 놈들이 무슨 그림을 그린다는 거야."


"아마 그들도 느끼고 있을 거야. 나도 느낄 정도니까. 단지 겁을 먹은 것뿐이겠지." 베를이 듀란에게 말했다.


"형도 알다시피 여기에서 그림 그리게만 하는 건 뉴엘의 재능을 썩히는 거야. 하다못해 스승이라도 구해주자고." 듀란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니면 형이 가르치는 건 어때?"


베를은 듀란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실력으론 무리야. 일단 계속해서 카피를 시키는 수밖에. 유명 작품들을 폭넓게 그리면 성장하길 기대해야지. 선생은 계속해서 알아볼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듀란의 아이디어는 꽤나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뉴엘이 그린 모조 작은 갤러리에 걸리게 되었고, 경매에 넘어간 작품들 또한 적절한 가격에 낙찰되어 팔려나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뉴엘의 개성이 작품에 너무나도 강하게 반영된다는 점이었다. 원작보다 생생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런 작품은 사려하지 않았다. 베를은 가끔씩 작업하는 뉴엘에게 찾아가 조언을 했다.


"카피에서 중요한 점은 원작의 혼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야. 하지만 최근 들어 너만의 색이 너무 강해지고 있어. 개인 작품을 그릴 때는 상관없지만, 카피를 할 때는 신경 써주길 바라."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뉴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듀란 또한 가끔씩 찾아가 조언을 했다고 한다. 베를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이다.


"카피든 너의 개인작이든 상관없어. 캔버스의 주인은 너야. 너만의 구도, 배치, 색을 담아내야만 해.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어. 넌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될 거야. 내가 보장하지. 아마 형도 같은 생각일 거야."


베를과 듀란이 일구어낸 경매회사는 점점 규모가 커져갔고, 뉴엘의 작업속도 덕에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모조 작하면 바로 베를의 회사를 떠 올릴 정도로 중산층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점점 뉴엘의 카피 작은 개인작과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점점 개성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원본의 희미한 느낌만 남아있을 뿐, 뉴엘의 새로운 작품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은 베를은 뉴엘은 직접 가르치기로 했다. 듀란은 틀에 박힌 기본기 교육은 오히려 뉴엘의 성장을 방해할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회사가 성장한 탓에 수익측면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베를은 시간이 날 때마다 뉴엘의 작업실에 가서 기본기를 알려줬고 끊임없이 있는 그대로의 카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뉴엘의 그림에서 개성은 점점 지워지고 원본을 거의 완벽하게 따라 그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의 베를은 붓을 잡은 뉴엘의 표정에서 웃음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시간이 더 많이 흘러, 뉴엘은 성인이 되었다. 뉴엘은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온종일 그림에만 몰두했다. 집에 돌아가지도 않고 작업실에서 잠을 자고 그림을 그렸다. 베를이 가끔씩 작업실을 찾을 때마다 뉴엘은 눈을 부릅뜨고 그림에 몰중해  카피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뉴엘이 개인작품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완성되는 카피작의 수준은 거의 완벽한 복제에 도달했으며 원본의 혼이 그대로 스며든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모든 게 순 졸리게 느껴졌다. 작업실의 틈을 모두 막은 채 번개탄을 피워 죽은 뉴엘의 모습을 두 눈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멍하니 며칠을 보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례까지 마쳐진 상태였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살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부담스러운 작업량 때문인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고 사그라들지 않았다. 듀란이 담배를 물고 사장실에 들어왔다.


"그 녀석, 죽기 전날에 나를 찾아왔었어." 듀란이 말했다. "더 이상 청어가 날뛰지 않는다더군."


"청어?" 듀란과 베를이 동시에 말했다.


"응. 원래 어릴 때부터 내 안에서 날뛰던 물고기들이야. 그림을 그리면 잠잠해졌는데 요즘은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어. 그림을 그려도 공허한 느낌만 들어. 하루종일 붓을 잡고 그림만 그려도 물고기가 날아다니 지를 않아. 아마 영영 사라져 버린 걸 지도 모르겠어." 뉴엘이 듀란에게 말했다.


"조금 쉬는 게 어때? 어느 정도 재고도 확보되어서 급한 상황도 아니거든. 개인 작품을 그려봐. 그러고 보니 개인 작품을 그리는 걸 한동안 못 봤네." 듀란이 말했다.


"그려지지 않아." 뉴엘이 시선을 땅에 떨구고 나지막이 말했다. 듀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뉴앨의 표정을 자세히 보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무리 그리려 해도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 난 그냥 흉내만 낼 줄 아는 화가에 불과해. 청어도 없어지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단지 붓만 들고 있는 빈 껍데기가 된 느낌이야."


듀란은 뉴엘을 꼭 안아주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야."


듀란은 이젤 위에 올려져 있던 캔버스를 내린 후 빈캔버스를 올려놓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그려봐. 단순한 점이어도 좋아. 일단은 찍고 생각하는 거야."


듀란은 어깨를 뉴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아틀리에를 나섰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처럼 아끼는 녀석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의 작품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어도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언젠가는 뉴엘의 작품이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그러한 시대가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자신이 그런 시대를 만들고 마리라.


하지만 뉴엘은 바로 다음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캔버스에는 꼬리가 살짝 난 점 하나가 찍혀있었다. 점을 찍고 어디로 선을 이을지 방황하다 그만둔 모양이었다. 듀란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뉴엘의 죽음 이후 베를은 예술의 거리에 위치한 전시회장에 뉴엘의 작품을 걸어 넣고 끊임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외면하려 했지만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뉴엘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알고 있었다. 청어의 날개를 전부 찢어버린 것도 자신이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예술가의 개성과 목숨을 자신이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간섭하기 전의 작품에서는 분명히 청어가 존재했다. 캔버스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베를은 후회 속에 뉴엘의 작품만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모조 작은 원본만을 충실히 이행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진 그였다. 하지만 뉴엘의 작품 속에는 분명히 뉴엘의 혼이 담겨 있었고 모조작이지만 원본을 넘어서는 의미를 만들어냈다. 뉴엘이 죽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매일같이 전시회장에 나와 35mm 필름 카메라에 작품을 담는 저 청년도 알고 있을까. 작품에는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 모조작이든 원본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미 뉴엘이 죽고 난 후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베를은 뉴엘이 중간중간 자랑스레 내민 추상화들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반겼던 그였지만 갤러리에 걸어도, 경매에 넘겨도 팔리지 않았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무엇인가 떠오른 그는 숲벽으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예술의 거리를 지나치고 홍등거리를 지나쳤다. 빈민촌마저 지나고 나니 눈앞에는 나무기둥들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 베를은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고 이윽고 빛이 나무만을 비추고 있는 기묘한 공간에 도착했다. 희미한 페인트 냄새를 느끼며 나무 뒤로 걸어 들어갔다. 캔버스 수백 개가 땅을 가득 덮고 있었다. 베를은 주저 않아 찢어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베를은 작품을 하나 둘 옮기기 시작했다. 여러 날이 걸렸다. 베를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뉴엘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마리라. 그러려면 자신의 기준을 정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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