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식 Sep 09.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25)

작가의 말 : 컴퓨터를 피치 못한 사정으로 초기화를 하니 미리 써둔 글과 그림이 전부 날아갔네요. 슬픕니다. 



던은 엠마를 따라 걸어갔다. 붉은등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어느새 빈민가에 들어서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판잣집을 양옆에 두고 좁은 길이 나 있었는데 도저히 사람이 살만한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나랑 이야기하고 싶다며. 내가 조용하고 한적한 장소를 알아." 잠시 뒤를 돌아보며 말하는 엠마는 어딘가 신나 보였다. 


엠마는 홍등가에서 나고 자랐기에 주변에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딱히 없었다. 글자를 배우기도 전에 몸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으며 다른 또래 친구들이 펜을 잡을 시기에 엠마는 삼촌들을 따라 수금을 하러 다녔다. 


"저기, 아까 싸운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돼?" 던이 조심스레 엠마에게 말했다. 


"아, 그거? 별거 아니야. 몇 달째 외상값을 갚지 않아서 돈 받으러 갔는데 적반하장으로 나오길래 손 좀 봐줬어. 그런 놈들은 뻔해. 자기 밥값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면서 조금이라도 푼돈이 생기면 바로 여자를 사러 오지." 엠마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살짝 눈 끝을 올리며 말했다. 무용담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듯한 살짝 들뜬 목소리였다. 참 별난 사람이네,라고 던이 생각했다. 


 "거의 다 왔다. 잘 따라와. 한동안은 깜깜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던이 엠마의 등에서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니 거대한 나무기둥들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 빈민가의 바스러진 판잣집을 가뿐히 뛰어넘는 높이였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어둠뿐, 저 뒤에 새로운 공간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에 가까웠다. 던은 실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자신의 불 꺼진 방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미지의 존재가 다가와 귀에 무슨 말을 속삭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낯설지만 조금은 익숙한 그런 감각이었다. 데자뷰, 이런 걸 데자뷰라고 하지 않았나, 하고 던은 엠마를 따라 어둠 속에 발을 들였다. 


몸을 밀어 넣고 나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동굴 속 흑해를 헤엄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만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왠지 이런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만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뭐라고?" 엠마가 말했다. 하지만 조금은 달랐다. 분명 자신의 앞에서 앞장서 걷고 있는 사람은 방금 전 만난 또래의 여자아이 엠마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것과는 조금 다른 목소리였다. 중성적인 엠마의 목소리에 비해 조금 더 부드러운, 굳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다면. 


노아. 던은 자신도 모르게 노아라는 이름을 나지막이 입 밖으로 꺼냈다. 


"기억난 거야?" 엠마가 말했다. 아니, 엠마가 아닌 듯하다. 그녀의 중성적인 목소리와는 결이 다르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어째서 자신의 앞에 있어야 할 남자를 당당히도 때려눕힌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 엠마에게서 노아의 목소리가 나는 것이지. 그녀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다면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초조함에 던이 목소리를 높였다. 


"엠마 맞아?" 


"나를 벌써 잊은 거야?" 이번엔 직접적으로 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흠칫 놀란 던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입체감이 소멸된 듯 어둠만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무언가 보일리 없었다. 


"노아?" 던이 다시 한번 이름을 읊조리자 서서히 눈에 감기고 온몸이 젤리로 가득 찬 욕조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이 욕조에 순차적으로 잠기며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그날의 기억이 차근히 떠올랐다. 


"던. 여기서 뭐 해. 원장님이 찾아." 


지금의 던은 16세 소년이다. 화재 속에 부모를 잃은 던을 맡아줄 친척은 없었고 자연스레 보육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보육원 건물 인조잔디 옥상에 누워 망이 쳐진 격자무늬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던을 누군가 불렀다. 노아다. 자신보다 3살 어린 금발머리의 소녀. 기억이 맞다면 이 소녀와 티 없이 맑은 교제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던이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며 말했다. 옥상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노아가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있었고 표정은 한없이 맑았다. 


"모르지. 혹시 저번에 새벽에 몰래 빠져나간 거 들킨 거 아닐까?" 노아가 입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그랬다면 너랑 같이 불렀겠지."


"그러네." 노아가 말을 마치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올렸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마테오가 원장님한테 말한 거 아니야? 아까 원장실에서 나오는 걸 봤거든."


노아의 말에 던이 몸을 벌떡 일으켜 빠르게 입구로 걸어갔다. "말해줘서 고마워. 원장실로 가볼게." 


"부르셨어요?" 던이 원장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할 말이 있지 않니?" 원장이 담담하게 말을 했다.


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너희는 아직 어른들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야.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만두는 걸 추천할게. 할 말은 은 이것뿐이야. 던 너도 알겠지만 어느 방면에서도 너는 날 이길 수 없어.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원장이 가소롭다는 듯 말을 마치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가봐도 될까요?"


"그래. 나가보렴. 내가 한 말은 잊지 말고. 넌 날 이길 수 없어. 언제까지고 말이야."


던은 원장실을 나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던. 다 왔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무서웠어?" 


중성적인 목소리에 꽉 쥐었던 주먹을 피고 앞을 바라보았다. 엠마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이라도 꾼 것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16살의 자신은 원장실을 나와 마테오에게 가고 있었다. 던은 자그마한 탄성을 내뱉으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잠시 생생한 옛 생각에 잠긴 모양이다. 걸으면서 꿈을 꾼다는 것은 역시 말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엠마의 뒤로 보이는 정경에 던은 입을 벌리며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어둠만으로 가득 찬 공간에 분명한 빛이 한 줄기 나있었다. 베를이 말한 그대로다. 거대한 녹색 나무 한 그루와 나무만을 비추는 빛줄기, 유명한 거리의 연극장의 무대 연출을 연상시키는 그러한 장면이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무의식의 가지를 잘라 단면을 들여다본다면 이런 장면이 아닐까. 


"어때? 이쁘지. 내 비밀 아지트야. 누군가를 데려와 본 적은 없어." 엠마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던은 주위를 멍하니 둘러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베를이 뉴엘의 재능을 알아본 숲벽속 공간, 필시 이곳임에 틀림없다. 베를의 입을 통해 전해 듣기만 했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장소가 바로 그 장소다. 엠마와 천천히 걸어가던 던이 무언가 발견한 듯 엇, 하고 소리를 내었다. 


"아 이거. 조금 부끄러운데." 엠마가 던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대한 주름진 나무의 뒤에 제각각의 캔버스가 일렬로 기대어져 있었다. 뉴엘 이외에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는 것인가. 혹은 베를이 미처 다 옮기지 못한 작품이 남아 있는 것인가. 던은 캔버스에 그려진 형체를 두 눈으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머릿속에 베를의 말이 떠올랐다. "흔히들 점이 모이면 선이 되고 선이 모이면 면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 반대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면이 모이면 선으로 응축되고 선이 다시 응축되면 점이 된다네. 뉴엘의 그림은 후자의 것이었다네. 불순물이 모두 걸러진 듯한 혼의 표출. 예술에 궁극적인 지향점이 있다면 아마 뉴엘의 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 생각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힌다네. 물론 지금도 포함해서 말일세."


던은 성큼성큼 걸어가 캔버스의 윗부분을 잡았다. 엠마가 무어라 말을 하며 던을 말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가장 끝에 있는 캔버스를 들춰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거대한 파도가 던을 휩쓸고 지나갔다. 물론 실제의 파도는 아니겠지만 분명히 파도다. 끝없이 바다 위 표류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그런 파도. 캔버스에는 자유분방한 색채의 선이 마구잡이로 그어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크레파스를 막 선물 받은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래의 등에 난 상처. 던은 그림을 보며 거대한 물고기의 표면에 난 상처를 떠올렸다. 그림을 바라보는 던에게 어둠 속 어딘가에서 베를이 말한다. '자네의 작품은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어.' 이런 것인가 작품에 무언가를 담는다는 것이, 던은 중얼거리며 다음 캔버스를 보기 위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뻗었다. 


"아 부끄럽다니까." 엠마가 온몸으로 손을 양쪽으로 크게 벌리며 캔버스에 손을 뻗는 던을 막아섰다. 


"뭐?"


"아무리 그래도 창작자한테 허락을 맡아야지. 그렇게 함부로 보면 어떻게 해." 엠마가 눈을 감고 소리쳤다.


그야 이미 죽었는걸, 하고 던이 말하려 했지만 엠마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부끄럽다니 무슨 소리야. 네가 그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던의 목소리가 조금 격해졌다. 머릿속에 빨리 다음 작품을 봐야만 한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 탓인가. 자신을 방해하는 엠마가 짜증 나게 느껴졌다. 


"아파. 이것 좀 놓고 말해." 엠마의 말에 정신을 차린 던은 그제야 자신이 엠마의 멱살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던은 온몸이 따끔거리는 듯한 기분 나쁜 통증을 느끼며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던은 엠마의 목옷깃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다. 던은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떠오를듯한 느낌이지만 흐릿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머리에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미지가 그려지고 통증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미안."


"괜찮아. 아까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표정도 무서웠고. 정체가 뭐야?" 엠마가 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모르겠어. 정말 미안해." 던이 양쪽 눈썹 끝을 내리며 말했다. 


"아직 누구한테도 보여준 적 없는 그림이란 말이야. 그래서 조금 부끄러웠어." 엠마가 아까 일은 잊어버리라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네가 그렸다고?" 던이 놀라 말했다. 틀림없이 베를이 말한 뉴엘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던은 아까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높이 모를 거대한 파도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몸을 살짝 떨었다.  


"응, 내가 그린 작품이야.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와서 그리고 있어. 전에 그려놨던 작품들 몇 백개를 도둑맞은 이후로 잘 안 그리긴 하지만."


던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분명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느낌이다. 어디서 들었더라 하고 마른 입을 쓸어내리던 순간 떠올랐다. 뉴엘이 죽고 난 후 베를이 어둠 속 공간에서 발견한 수백 개의 작품. 던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혹시 베를이 손수 옮긴 캔버스는 이 소녀의 작품이 아닐까. 


 





 



이전 24화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리빵 조각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