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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Sep 09.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26)

작가의 말 : 천재, 우리의 인지를 아득히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흔히 하는 말입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한 둘은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마주하면 쉽게 경쟁을 포기하곤 합니다. 천재들의 인생에도 또 다른 천재가 분명히 존재했을 겁니다. 세상은 넓고 한계는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계단처럼 직선적으로 단계가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순환할 뿐이죠. 언뜻 보면 평범한 우리들 또한 누군가에게 한때는 천재로 비치지 않았을까요?



"혹시 그림 좀 봐도 될까? 사실 나도 그림을 그리고 있거든." 던이 말했다.


쑥스러운 듯 엠마가 몸을 비틀며 대답했다. "좋아."


던은 하나 둘 캔버스를 들춰가며 차례로 작품을 보기 시작했다. 어느 하나 빠짐없이 모두 어떠한 종류의 체험을 던에게 선사해 주었다. 고래가 잠들어 있는 넓은 바다, 고운 모래로 가득한 소라 해변가, 아무도 없는 쓸쓸한 섬까지. 던은 하나씩 넘겨가며 탄성에 새로운 탄성을 더했다. 이런 것이 재능인가, 베를이 뉴엘을 처음 봤을 때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인가. 열등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득히 멀리 있는 이런 종류의 그림은 죽을 때까지 절대 그리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른한 경쟁심이 이슬이 잔디에 스며들듯 던에게 차곡히 쌓여갔고 마지막 캔버스까지 전부 감상한 던은 잠시 멍하니 엠마를 바라보았다. 이 소녀만 따라잡는다면, 이런 종류의 그림만 그려낼 수 있게 된다면, 하고 방금 전의 작품을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각오한 일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재능과 영감이 고르지 않게 흩뿌려져 있다. 나쵸에 뿌려진 크림소스처럼 절대 균등하지 않다. 그런 세상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넘어서리라. 노력과 열정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런 생각을 차분히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림을 그린 지 얼마나 됐어?"


"음, 잘 모르겠어. 그래도 몇 년은 되지 않았을까? 엄청 어릴 때부터 여기에 왔었으니까."


"누구한테 배운 거야?" 던이 다시 물었다.


"배웠다기보단 지켜봤어. 사실 여기에서 매일같이 그림을 그리던 화가가 한 명 있었거든."


던은 엠마의 말에 뉴엘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는데 갑자기 나에게 붓을 쥐어주고 그림을 그려보라 했거든. 그때부터 취미 삼아 하나 둘 그려봤어. 생각보다 재밌더라고." 엠마는 자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붓을 쥐어주는 민소매의 화가를 떠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만나지 못했지만."


뉴엘이 확실했다. 아마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탓에 보이지 않았겠지, 하고 던이 생각했다. 


"맞다, 나랑 이야기하고 싶었다 했지?" 엠마가 화제를 전환했다.


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작품을 보고 난 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엠마의 그림만이 맴돌았다. 과학시간 자석에 달라붙은 철가루처럼 엠마의 그림은 던의 뇌리에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정식으로 내 소개를 안 했네. 내 이름은 엠마야. 홍등가에서 수금을 하고 있어. 아까 봤듯이 종종 그림도 그리고 있지. 돈을 받고 그림을 팔아본 적은 없어. 그럴 생각도 없고." 엠마가 말했다. 


"내 이름은 던이야. 나이는 20살이고 베를레인이라는 회사에서 카피 화가로 일하고 있어." 


"진짜? 나랑 동갑이네? 틀림없이 나보다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엠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나저나 화가라니 대단하다. 네가 보기에 내 그림은 어때? 역시 아직 부족한가?" 엠마의 동그란 눈이 보랏빛으로 로 초롱초롱 빛났다.


"카피 화가야. 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고 남의 작품을 복제할 뿐이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화가랑은 거리가 멀어." 던이 조금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작품말인데" 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좀 전의 캔버스를 보며 느꼈던 강렬한 감촉을 떠올렸다. "신기해. 살아있는 듯한 그림이야. 내가 지금까지 봐온 어떤 작품보다 대단한 것 같아." 던은 말하면서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열등감인가 질투심인가, 그런 종류의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진짜?" 엠마가 작게 말하며 던을 슬며시 올라다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덧붙였다. "나도 화가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세상을 놀라게 할 화가가 될 거야. 틀림없어." 던은 짓다 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세상을 놀라게 할 화가, 이 타이틀은 자신의 것이다.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하지만 엠마에게 이런 대사를 뱉으며 동시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자신은 세상을 놀라게 할 화가가 될 수 있을까. 이 소녀가 미술계에 들어온다면 그녀에게 밀려 자신의 작품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영원히 묻혀 잠들게 되지 않을까. 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구도나 배치 같은 부분에서 미숙한 것 같아. 조금 더 연습이 필요하겠어. 내가 도와줄게." 던은 말을 마치고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정말 그녀의 그림에 부족함 점이 있는가. 혹시나 부족한 점이 있다 한들 그것은 그녀의 작품이 아니라 자신의 안목이리라. 이 그림을 베를이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소녀가 자신의 자리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이 공간에서 그녀의 작품이 새어나가지 않았으면 한다. 어쩌면 유망한 소녀의 재능을 자신이 묻어버리지는 않을까. 


던은 당장 붓을 들고 싶어졌다. 이런 감정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다. 자신은 아직도 한참이나 부족하다. 조금은 재능이 있는 줄 알았지만 카피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나 가봐야겠다." 던이 말하며 황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림뿐이다. 


"벌써?" 엠마가 아쉬운 듯 던에게 말했다. "그림은 언제부터 가르쳐 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엠마의 표정은 영락없는 순수한 꼬마소녀를 연상시켰다. 거리에서 싸움을 하던 좀 전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내일부터,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서 만나자." 


어둠 속 공간을 뛰다시피 빠르게 빠져나온 던은 곧바로 베를레인의 건물로 향했다. 속으로 숫자 5를 떠올렸다. 앞으로 5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으리라. 주어진 하루의 모든 시간을 그림에 쏟아부어야만 한다. 베를이 말하는 혼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쏟아붓고 또 쏟아부어 완성시켜야만 한다. 엠마의 그림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려야만 한다. 쏟아낼 것이 없다면 세포 하나까지 쥐어짜 내리라. 


자신의 아틀리에에 도착한 던은 곧바로 빈 캔버스를 올려놓고 붓을 들어 선을 긋기 시작했다. 무엇을 그려야겠다는 삼각 이정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베를이 어둠 속 공간을 헤쳐 뉴엘을 만났던 것처럼, 자신이 어둠의 공간을 지나 엠마의 작품을 마주했던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을 헤쳐나가며 직접 길을 만들 것이다. 사전 계획은 필요하지 않다. 계획은 오히려 순수한 예술 행위의 이어나감을 제한할 뿐이다. 캔커피의 달콤한 목 넘김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선을 긋는 동시에 다음 선을 생각하고 팔레트의 물감에 붓을 찍는 동시에 다음 면을 생각한다. 작업실에는 오로지 채워져 가는 캔버스만이 존재했고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순간 이질감이 드는 색을 사용했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지만 곧바로 붓을 팔레트에 옮겨 덧칠하기 시작한다. 실수가 생겼다면 이용하면 그만이다. 실수 또한 작품을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로제크림빵에 덧대어진 소금처럼, 어긋난 것처럼 보이는 선과 색채는 다음 점에 의해 캔버스에 풍미를 더해주는 조미색이 된다. 붓을 든 손이 더욱 빨라짐과 동시에 캔버스가 줄어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닌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시야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여백을 채우는 점을 찍는 동시의 다음 여백으로 선이 이어진다. 그다음 여백으로 다시 점이 연결되고 입체적인 면이 된다. 스스로도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청어. 지금 내면에서 날뛰고 있는 이것이 청어인가. 베를의 말이 떠오른다. 뉴엘의 내면에서 더 이상 날뛰지 않고 잠들고 만 혹은 소멸되고만 청어. 자신의 내면에서 긴 바다잠을 자고 깨어난 것인가. 청어의 꼬리에 엔진이 달렸는지 끝을 모르고 솟아오르며 몸의 여기저기에 부딪힌다. 리듬에 맞추어 선과 선을 연결하고 팔레트와 캔버스를 연결한다. 그리고 아마 뉴엘과 자신, 엠마와 자신을 연결한다.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그림에 열중한 던은 어느새 캔버스의 모든 부분에 빠짐없이 색코트를 입혀주었다. 연결된 동작인 듯 완성된 캔버스를 내려놓고 벽에 기대어진 새 캔버스를 다시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반복이다. 청어들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붓을 잡은 이래 처음 느껴보는 고양감에 던은 계속해서 캔버스를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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