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28)
작가의 말 : 무작정 노력만 한다고 제 앞에 있는 소설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유명 작가들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떻게 저런 표현을 생각해 낼 수 있지?' 혹은 '이런 소름 돋는 전개 방식은 어떻게 떠올리는 거지?'하고 위축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항상 그럼에도 내가 언젠간 더 유명한 작품을 써내야지, 하고 다시 노트북을 열어 자판을 치기 시작합니다.
후원자와의 시간을 보낸 후로 던은 한동안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영혼이 부정당한 느낌은 던을 어둠의 더욱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원장에게 접대실에서 일어난 일을 빠짐없이 말을 했지만 원장은 그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왔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는 듯 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쩔 수 없지 않냐,라는 식의 말만 덧붙일 뿐이었다. 어둠의 밑바닥, 어떠한 색채도 숨통을 틔울 조그마한 공기방울도 없는 끝없는 절망의 하강. 걷잡을 수 없는 증오심만이 던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어떻게든 표출해야만 했다. 계속해서 영혼에 주입되며 흘러내리는 절망감을 그대로 놔둔다면 결국엔 터져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고스란히 담겨 있던 혼의 조각은 여기저기 흩뿌려져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던의 증오심은 늙은 여인이 아닌 원장에게로 향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자신을 절망의 늪에 밀어버린 사람은 후원자인 그 여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모든 증오의 조준점은 원장을 가리켰다. 다 타버린 나무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연기처럼 잘 보이지 않는 원장의 약점을 잡아야만 한다. 그리고는 시계의 초침보다 더 날카로운 바늘말뚝을 수백 개, 아니 수천 개 박아 넣으리라. 신기하게 복수를 다짐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부정당했던 영혼의 공간에 복수심이 차올라 오히려 전보다 더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존재할지도 모르는 무관심한 신을 믿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하고 던은 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에린네스.
던이 가장 먼저 해야만 했던 일은 보육원의 아이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아마 어릴 때부터 당해왔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왔을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더럽혀지는 것도 모른 채 저들에게 순순히 내어주어 왔을 것이다. 던은 차근히 아이들에게 접근했다. 보육원에는 던을 포함해 총 14명의 아이가 있었다. 가장 어린아이는 8살의 마테오, 그리고 던 자신이 가장 나이가 많았다. 아이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맥락 없이 끊임없이 나오는 아이들의 말에 지칠 때도 있었지만 꾹 참고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마주칠 때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다시 물어봐주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신난 듯 이야기를 마구 꾸며내 던에게 언제까지고 말해주었다. 던은 게임을 고안해 내었다. 아이들을 한데 묶기 위해선 공유하는 추억 혹은 내용물이 있어야 했다. 던은 '이야기 만들기'라는 게임을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돌아가며 문장을 써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만드는 게임이었다. 노아는 그 이야기를 받아 적어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화제는 레고 장난감에서 이야기 만들기 게임으로 서서히 옮겨갔다. 누구의 이야기가 무서웠다, 혹은 재미났다 등 아이들끼리 서로의 이야기를 평가하고 비교했다.
매주 접대실에 불려 갈 때마다 온몸이 떨리고 무서웠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혼자서라도 보육원을 빠져나갈까 수차례 고민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악몽에 쫓기는 잠결에 짐을 싸다가도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동생들을 보면 새겨진 상처에 더 깊게 각오가 새겨졌기 때문이다.
던의 입지가 올라감에 따라 던의 말에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다. 던과 같이 밥을 먹기 위해 다투는 아이들도 생겨났고 그럴 때마다 던은 공동체라는 개념을 강조하며 자발적으로 화해하게 했다. 유대감은 나날이 강해지고 자연스레 접착제가 날마다 발렸다. 이제 다음 계획으로 옮길 차례다.
인공 잔디가 깔린 격자망이 쳐진 옥상은 던이 새벽에 자주 찾는 장소였다. 팔을 베고 누워 격자무늬의 하늘을 쳐다보면 어딘가 마음이 차분해졌다.
"여기서 뭐해?"
노아였다.
"언제부터 있던 거야?" 던이 말했다.
"방금 올라왔어. 던이 새벽마다 여기에 올라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노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고는 던의 옆에 누웠다. 노아와 베를은 조각난 달빛을 받는 잔디를 배경으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던, 혹시 요즘 무슨 고민 있어? 뭔가 위태로워 보여. 얼굴은 항상 웃고 있지만 나는 알 수 있어." 노아가 말하고 옆으로 몸을 틀어 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던의 가슴을 가리켰다. "여기에 있는 던은 계속해서 울고 있어 그리고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항상 마음이 아파."
노아의 말에 던은 양동이에 담긴 얼음물을 그대로 뒤집어쓴 기분을 느꼈다. 수학자가 증명을 막힘없이 써 내려가는 중에 초기변수가 빠졌음을 깨달은 것처럼.
"내가 울고 있다고?"
"던은 울고 있어. 나는 알아.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 노아가 말했다.
던은 미적지근한 무언가가 얼굴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물이었다. 던은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나, 하고 눈을 좁혔지만 빗물이 떨어지고 있을 리 없다. 눈물이다. 아무런 감정을 수반하지 않은 눈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 자신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가슴에서는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노아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어 던의 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앞으로는 나에게 말해줘. 난 던의 모든 걸 알고 싶어."
던은 지금까지의 일을 빠짐없이 말했다. 잊어버리고 싶은 접대실의 기억부터 원장의 말과 자신의 계획까지. 차분히 말을 마친 던은 노아를 바라보았다. 순간 던의 가슴이 아려왔다. 새빨개진 노아의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던도 그렇게 느꼈구나. 난 내가 이상한 줄 알았어. 접대실을 다녀와도 다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고 지내니까. 하지만 최근 들어 접대실에 들어가기 무서워졌어. 자연스러운 일이라지만 너무 무서우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면 이곳에서 내 자리가 없어질 거 같아서 참았어. 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 조금은 위로받는 기분이야."
던은 말없이 노아를 안아주었다. 던의 따뜻한 품 속에서 노아가 말을 꺼냈다.
"잠깐 나갈래? 내가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원장님 몰래 가는 곳이 있어."
던은 노아를 따라 보육원 뒤편에 조그맣게 난 개구멍을 통해 보육원 밖으로 나왔다. 그 후 노아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생각보다 높지 않은 산이었다. 매우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노아의 손을 잡고 걷다 보니 눈 깜짝할 새에 산의 초입에 도착해 있었다. 그 뒤로 차도를 조금 더 걸었다. 노아가 안내한 곳은 간판이 없는 전당포였다. 보육원의 생활관보다 더욱 작은 직사각형 공간에는 금시계와 금반지가 진열된 금 간 유리케이스, 벽시계가 있었고 마루매트가 깔린 조금 높은 바닥이 있었다. 그리고 부채를 들 할아버지가 그곳에 누워서 아날로그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노아가 입구를 들어가며 신난 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리모컨을 통해 티브이의 소리를 줄였다.
"노아 왔니? 오늘은 혼자가 아니구나."
"네, 저랑 같이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3살 오빠예요."
그렇게 던을 소개한 노아는 자연스레 빗간 진열대 뒤의 마루매트에 올라간 후 던에게 손짓했다. 망설이며 진열대 뒤로 간 던은 조심스레 마루매트에 앉았다. 정면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꽤나 넓은 바닥이었다. 얼마 전까지 할아버지가 누워있던 탓에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기분 좋게 엉덩이를 바쳐주었다.
노아의 말에 의하면 노아는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맡겨졌고 후원자와 처음 만난 나이는 6살이었다. 보육원에 매달 몇천만 원씩 기부하는 노아의 후원자는 아직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여자아이를 통해 자신의 성욕을 풀었던 것이다. 노아는 덧없는 순수함에 후원자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차오를수록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었고 알 수 없는 답답함에 무작정 보육원을 뛰쳐나왔다. 정처 없이 걷던 중 만난 할아버지가 지금 던과 노아의 옆에 앉아있던 낡은 전당포의 주인 윌포드였다.
던과 노아는 그 이후로도 종종 전당포를 찾아갔다. 윌포드는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고 작은 마시멜이 띄워진 코코아를 타주었다. 어떤 얘기를 해도 인자한 웃음으로 조용히 들어주던 윌포드는 보육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아마 노아를 통해 들었던 모양이다. 피가 섞여있지는 않았지만 던은 점점 윌포드에게 마음을 열었고 친할아버지처럼 느끼게 되었다. 던은 노아에게, 윌포드에게, 그리고 셋이서 보내는 낡은 전당포 안 새벽의 시간대에 마음을 내어주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새로운 집을 구한다라." 윌포드가 던의 얘기를 듣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였다. "전에도 말했듯이 다른 어른들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을 거란다. 보육원에 연관된 수많은 돈과 사람들의 촘촘한 연결망을 뚫고 세상에 폭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이지. 지금의 아이들만을 데리고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군, 하지만 던, 그게 복수로 이어지지는 않을 거란다. 너희가 나가도 새로운 아이들이 채워지고 원장은 그 아이들을 통해 다시 돈을 벌겠지."
"윌포드, 나도 알아. 지금 당장 복수하겠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 원장도 언젠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지. 그때가 되면 나도 많이 나이를 먹었을 거야." 던은 말을 이으려다 멈췄다. 끔찍한 상상이었다. 노아가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돈이 필요하겠군, 돈은 어떻게 마련할 생각이지? 내가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미안하구나." 윌포드가 말을 잠시 멈추고 빗간 진 열대로 시선을 향했다. 시선 끝에는 금시계가 반듯이 놓여 있었다. "이 시계를 팔면 몇천은 나오겠지만... 주인이 언제 찾으러 올지 모를 일지..." 윌포드가 조그맣게 덧붙였다.
"괜찮아. 녹음본을 가지고 원장에게 딜을 할 예정이야. 그때 윌포드의 도움이 필요해. 도와줄 수 있어?"
"물론이란다." 윌포드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나에게 접대실 녹음본이 있어. 이걸 들고 윌포드가 보육원에 찾아와 줘. 그때의 윌포드는 전당포 주인이 아니라 기자인 거야. 알겠지?" 던이 윌포드에게 말했고 윌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 녹음본을 원장에게 팔겠다고 해. 받은 돈의 일정 부분은 윌포드에게 줄게, "
"좋은 생각이구나." 윌포드가 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