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식 Sep 03. 2024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18)

작가의 말 :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엄청 미워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정반대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죠. 하지만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혹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묻힌 수많은 마음들을 생각하면 어딘가 묘한 느낌이네요.



베를레인의 아틀리에 공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던은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냈다. 이슬잔디를 가로질러 푸른 건물 2층, 자신의 작업실에 도착해 작업 테이블에 캔커피를 올려놓고 캔버스 앞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그 후, 캔뚜껑의 틈에 손톱을 밀어 넣는 동시에 전날 작업을 상기시켰다. 끊기지 않는 흐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눈을 뜬 던은 곧장 팔레트에 물감을 짠 후 브러시에 묻혀 캔버스로 전달했다. 원본의 이미지를 다시 찾아보는 일은 결코 없었다. 두꺼운 책 사이에 껴 있는 잎 책갈피처럼, 마음만 먹으면 머릿속에서 고스란히 꺼내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묘하게도 그림에 한정해서만 그랬다.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를 구성하는 한 장면을 떠올리기 힘들었지만, 스쳐 지나간 작품을 볼 때만은 몸 어딘가의 카메라가 작동되는 느낌이었다.


던이 한 달 동안 완성시켜야 하는 모작을 다 그려낸 건 베를레인에 카피 화가로서 출근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던이 마지막 붓놀림을 멈추고 캔커피를 마시던 참이었다.


"너구나." 남자가 노크도 없이 작업실에 들어오며 말했다. 이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노크라는 개념이 없는 것인가, 하고 던은 소피를 떠올렸다.


"누구시죠?" 5대 5 가르마에 살짝 찢어진 눈, 동양적인 얼굴이지만 나름 매력적인 얼굴이라 생각했다. 키는 자신보다 조금 작으려나, 하고 던은 소년 병사를 떠올렸다. 부사장이라는 직함에 비해 생각보다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저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잘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신으로서는 추측하기 힘들 것이다.


"어이, 나 몰라? 직원이 회사의 부사장 얼굴 정도는 알아야지." 듀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말투가 건방진 듯했지만 근원모를 무거운 아우라가 느껴졌다.


"저는 던이라고 합니다." 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듀란은 던의 인사를 무시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천천히 던의 완성된 캔버스로 다가왔다. 듀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흠, 하고 옆에 완성되어 걸려있는 다른 작품들을 훑어보았다. "여기서 작업한 지 얼마나 됐지?"


던은 날짜를 손가락을 접어가며 센 후 대답했다. "이제 2주 정도 되었습니다."


"상당한 실력이네. 이번에 걸릴 파이프담배, 아마 제목이 균열의 순간이었나?"


던은 듀란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던입니다."


"그래, 던 너는 아무래도 화가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것 같네. 하지만 그뿐이야.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전혀 타고나지 않았어. 카피 화가로의 길을 잘 선택했어. 내가 단언하지, 너의 작품은 절대 팔리지 않을 거야. 좋게 생각해 본다면 작은 상점들의 인테리어 소품, 딱 그 정도가 적당하겠어." 듀란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단순한 객관적인 감상의 나열, 그 이상의 의도가 있었더라면 바로 알아차렸겠지,라는 생각과 자신의 첫 완성작을 머릿속에서 떠올려 보았다.


"일단은 새로 오픈하는 갤러리에 너의 작품이 걸리긴 하겠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너의 카피 속도면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그림을 복제하는 재능을 타고난 것도 축복받은 일이지. 이도저도 아니면서 무작정 예술계에 발을 들이는 한심한 녀석들이 널렸으니까." 듀란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라디오에서 호스트의 대사가 흘러나온다.


"긴급 속보입니다. 유명한 미술품들이 또 도난당했습니다. 반고희의 해바라기에 이어 이번에는 무려 7점의 작품이 한꺼번에 사라졌는데요. 정확한 상황은 조사 중이지만, 미술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희의 작품이 도난당했다는 뉴스를 불과 얼마 전에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한꺼번에 7점이라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세계적인 미술관과 박물관의 보안이 이렇게나 간단히 뚫릴 정도로 허술한 것인가. 아무래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던이 라디오에서 다시 시선을 돌리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호스트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듀란이 어딘가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참히 살해된 적의 시체를 보고 웃는 소년 병사, 던의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여기 계셨습니까?" 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듀크와 던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서류철을 들고 있는 소피였다. 입을 꾹 다물고 듀란을 노려보는 소피의 표정이 화가 난 새끼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사장님이 부르십니다. 부사장질에도 안 계시고 회수부서실에서도 안 보여서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듀란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래,라는 말만 하고 소피를 지나쳐 나갔다.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듀란이 여기 왜 온 거야?" 듀란이 나가자 소피가 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나도 모르지." 던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가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감도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이 무슨 얘기했어?"


"그냥 완성된 작품에 대해서. 별 말은 없었어. 그냥 한 번 쓱 훑어보던 참에 네가 들어온 거야." 던은 잠시 고민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답했다.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없다는 듀란의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소피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입을 벌리고 다시 말했다. "뭐야, 벌써 다 끝낸 거야? 4 작품을? 진짜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렇게 빨리 끝낼 수가 있어? 게다가 원본이라 해도 믿을 정도잖아." 소피가 캔버스에 손을 가져가다 아직 물감이 마르지 않은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사장님께 보고는 내가 드릴게. 알지? 이번 달 작품 4개 다 끝내면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제 내 작품을 시작하려고. 여기, 꽤 맘에 들거든." 던이 말하며 미소를 지었지만 곧바로 다른 사람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그맣게 일그러졌다. 듀란의 말이 머리를 계속해서 맴돈다. "너는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전혀 타고나지 않았어."





  



  











이전 17화 [오리지널 소설] 무너진 기억의 방과 크림빵 조각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